기와와 이끼 어울려 예스러운 바닷가 양반마을
2007. 5. 11. 15:39ㆍ정보 얻어가는 즐거움
기와와 이끼 어울려 예스러운 바닷가 양반마을 |
경북 영덕 괴시리 전통마을을 찾아서 |
전통이란, 사라진 사람들의 흔적이러니 흔적이란, 흘러간 옛 시절의 올곧은 자취이러니 올곧은 자취란, 낡은 툇마루 너머 피어나는 작은 연기이러니 여기 영해평야를 앞에 하고 망월봉을 뒤로 한 괴시리 전통 마을에서 전통과 흔적, 그리고 올곧은 자취를 꿈결처럼 쳐다본다. 줄지어 선 고택들 사이에는 고요보다 더 고요한 정적이 흐르고, 세월의 흐름 따라 피어난 초록빛 이끼들은 지나가는 나그네의 눈길에 아프도록 들어온다. 이상도 해라. 바닷가 근처의 한적한 마을에 무섭도록 흐르는 정적이 어찌하여 이토록 정겹단 말인가. 쳐다보고 또 쳐다봐도 괴시리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토담을 따라 늘어 선 기와들은 아낌없이 고독을 발산하는데, 인적 드문 낯선 마을이 왜 이리도 포근하게 다가온단 말인가. 목은의 절절한 아픔 기와 속에 배어나고
가만 가만 토담 옆에 난 길을 따라 조용히 걸어본다. 황토 빛을 반사하는 흙길을 따라 가는 발걸음이 지극히 편편하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한 줄기 새하얀 연기. 아, 저거였군. 짙은 회색빛 사이로 새 하얗게 피어나는 굴뚝의 작은 연기. 그게 바로 이 정겨움의 본류였군. 여기에도, 200년의 세월을 음전하게 간직한 여기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구나. 여말 선초의 대학자이자 사상가였던 목은 이색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괴시리 마을. 외가였던 이곳에서 태어난 이색은 황망히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운명을 용서할 수 없었다. 어떻게 세운 왕조인데, 어떻게 만든 나라인데 이다지도 허무하게 사라진단 말인가. 그러나 정몽주와 더불어 폐가처럼 쓰러져 가는 조국의 부활을 외쳤던 그에게 돌아 온 것은 조선이라는 칼날이었다. 포은이 스러져 가고, 사랑하는 두 아들도 스러져 가고, 결국 그도 참람하게 스러져 갔다. 괴시리에는 목은 이색의 절절한 그리움이 낡은 기와의 이끼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건축학도 유혹하는 조선 후기 전통가옥 30동
30여동의 고 가옥들이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보존 한 채 200년의 세월을 지키고 있는 괴시리 전통 마을. ‘ㅁ’자의 형의 평면구성과 희귀한 지붕 형태 등을 간직하고 있는 이 마을의 고 가옥들은 그 건축학적 가치가 우선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지금도 건축학도들의 발걸음을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다. 엄격한 유교 문화를 지녔던 영해의 양반 가옥들이 놀랍도록 잘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마을에는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고옥들이 6채나 된다. 근대화의 물결에 밀려 폐가처럼 변한 마을을 경북도청과 영덕군이 훌륭하게 복원시킨 결과이다. 괴시리 마을에는 원래 네 개의 성씨가 살았다고 전해진다. 영양 남씨, 함창 김씨, 수안 김씨, 그리고 영해 신씨가 살았는데 세 개의 성씨는 다른 데로 떠나고 영양 남씨만이 마을을 지켰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 마을에는 영양 남씨 일족들이 고택을 지키며 살고 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이렇게 고풍스런 양반 마을이 왜 하필이면 바닷가 근처에 형성되었나 하는 점이다. 이 마을은 울진에서 영덕으로 가는 7번 국도변의 영해 4거리에서 대진 항으로 접어드는 12번 군도를 따라 조금만 가면 나타나는 곳이어서 바다와 아주 가깝게 있다. 보통 양반가 마을은 내륙에 형성되는 것이 보통인데 왜 하필이면 이곳에 터를 잡았단 말인가. 해답은 바로 마을 앞에 있는 ‘영해평야’에 있었다. 강릉과 더불어 동해안의 3대 평야로 불리는 영해평야는 세도가들의 터전이 되기에 충분한 곡식과 자원을 생산했다. 널따란 평야를 세도가들이 놔 둘리 만무할 터. 민초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생산한 쌀에서 그들의 세도와 유교문화가 탄생한 것이다. 게다가 바다가 가까이 있어 내륙에서 구하기 힘든 어물 자원을 수시로 구할 수 있으니 일석삼조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영해평야 덕 본 양반마을의 본명은 ‘호지촌’
원래 괴시리는 호지촌 이었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이 있었고, 북쪽에는 호지라는 작은 못이 있었기에 그리 불린 것이다. 그러나 원나라에서 벼슬한 목은 이색이 마을의 지세가 중국의 괴시와 흡사하다 하여 괴시라고 이름 붙였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다소 씁쓸한 이름이기도 하다. 중국이면 중국이고, 조선이면 조선인데 왜 원래 있는 이름을 엉뚱한 중국의 마을 이름으로 바꾸었는지. 사대주의에 젖은 이색의 단면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인지라 입맛이 썩 개운치 않다. 괴시리에서 가장 주목받는 고택은 아무래도 영양 남씨의 종가집이라고 할 수 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5호인 이 고택은 정침과 사당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조선 후기 주택 형태를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침은 제사를 올리는 몸체 방으로써 정면 8칸, 측면 5칸의 규모이며 전형적인 ‘ㅁ'자 구조를 갖고 있다. 경북 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된 물소와 고택도 눈여겨 볼만한 가옥이다. 이 집의 특징은 당시의 유교적 윤리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집 안 우물에서 가사 작업하는 여성들이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집 안에 6m정도의 담벼락을 별도로 세운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또한 남 ·녀의 생활공간을 엄격히 분리하기 위해 사랑채 정면이 여성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배려했다. 이외에도 별도의 대문채가 있는 경주댁이나 천전댁도 특이한 구조로 유명하다. 특히 천전댁은 속칭 날개집이라 하여 안채와 사랑채가 이어져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只’자 형의 평면구조라고 불린다. 19세기 전반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천전댁은 경북도내의 전통 가옥 구조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인 것이다.
다시 고옥들이 만들어 놓은 골목길로 편편한 걸음을 내딛는다. 새하얀 연기는 여전히 회색빛 기와 사이로 흐르고 있고, 인적 끊긴 골목길 사이로 견공의 울음소리가 가늘게 들려온다. 운치란, 고택의 툇마루에서 봄비에 젖어가는 마당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예스러움이란, 퇴락한 고택의 서까래에서 풍겨나는 나무 향을 음미하는 것이다. 기다림이란, 기와 골 사이로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손으로 무심히 잡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감동이란, 情人과 함께 고옥의 담벼락에 쌓인 눈을 바라보는 것이다. 고옥의 추루한 대문 사이로 아련하게 보이는 꽃다지가 잔잔한 아름다움을 안겨주는 곳. 괴시리 전통 마을에 흐르는 가향이 가슴속에 아릿하게 스며든다. ┃국정넷포터 김대갑(kkim40@hanafos.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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