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곽(水廓) 나는 한때 물처럼 맑다고 생각했다. 물로 집 한 채 지었거나 물의 집이라는 생각도 가져 보았다. 그런 나를 비추자 물빛이 흐려졌다. 내가 지은 집은 지는 해로 지은 것이었다. 고인 물을 막은 것에 불과했다. 내가 흐르는 물자리였으면 새 몇 마리 새 자리를 놓았을 것이다. 갑..
꽃구경 꽃 세상이다 길에도 꽃, 하늘에도 꽃 사람도 꽃처럼 피어 꽃 범벅 눈 시린 봄날 하얀, 분홍 꽃잎이 햇살에 뒤집어져 눈 오듯 사랑 오듯 팔랑거리는데 꽃인 듯 사랑인 듯 피었다 지는 것이 그저 서러워 꽃잎 밟으며 먼 시간을 만져본다 돌아보면 첩첩이 풋풋한 시절 하얀 듯 불그스..
구석과 모퉁이 사물들을 가만 살펴보면 구석과 모서리가 있다. 어디 사물뿐이겠는가. 어둡지만 아늑하게 숨은 공간이 있다면, 밝게 열려있는 공간도 있다. 어떤 대상이든 한쪽 면만으로 다 알 수 없다. 양면을 다 알아야 진면목이 보인다. 안과 밖을 모두 알아야 비로소 오해와 편견은 멀..
마음이 무엇일까? "엄마, 마음이 뭘까요?" 아들이 묻습니다. "글쎄, 마음이 무엇일까?"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마음. 마음은, 마음에 대해 말을 해야 할 때마다 당혹감을 느낍니다. 마음은, 가장 귀하고 중요한 깨달음의 기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하고 오류를 범하며 ..
단풍 가을은 중년의 계절인가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질수록 산은 밤새 뒤척이고 흐르는 냇물 소리 더욱 맑게 들리고 지난 푸르던 시절 지나치고 온 길가에 억새는 어느새 새치처럼 하얗게 피어있고 세월 갈피 속에 밤새 밑줄 그어놓았던 이야기들 단풍으로 산자락에 붉게 물들어 있다 ..
바나나는 등이 가려울 때 열린다 바나나는 등이 가려울 때 열린다 손이 닿지 않는 그곳은 습한 열대 그는 돌아앉았던가 허리를 굽혔던가 바나나는 그때마다 다른 음으로 흔들리고 익는다 매달릴 때마다 하나씩 없어지는 저 손가락 - 최인숙, 시 '바나나' - 줄에 걸어놓은 바나나가 익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