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셜록 홈스처럼 자백받고 체포?… 사립탐정은 증거만 좇는다

2014. 4. 25. 10:47지적재산권 보호활동뉴스

[Why] 셜록 홈스처럼 자백받고 체포?… 사립탐정은 증거만 좇는다

허자경 | 2014/04/19 07:39

 

 

 

 

지난해 12월 31일 새벽. 터키 국적의 화물선 한 척이 터키를 출발해 부산항에 도착했다. 선내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4일 전 태평양을 지나던 중 도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사라진 것은 선장실 금고 속 달러 뭉치. 금고 안엔 달러가 담겨 있던 서류 봉투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이 배엔 외국인 선장을 포함, 6개국 선원 22명이 타고 있었다. 공해(公海)상에 떠 있는 외국 배에서 외국인이 벌인 도난 사건이라 한국 경찰도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범인을 찾지 못해 화가 난 선장은 사건 조사를 위해 이전부터 거래해온 한국의 손해사정 회사에 전화를 걸어 '그 남자'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그 시각 부산항에선 정장 차림의 '그 남자'가 문제의 화물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은색 '007가방' 2개를 든 남자는 도착한 배에 올라탄 후 라텍스 장갑부터 끼었다. 이어 가방 속에서 분말과 붓, 시약과 다리미 등을 차례로 꺼내 들고 금고 주변을 세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이 남자는 약 3시간 동안 작업한 끝에 금고 주변에서 지문 7개를 찾아냈다. 시약을 적신 서류 봉투에서도 지문 3개가 나타났다.

다음 순서는 선원 22명을 대상으로 한 지문 채취. 열 손가락 지문을 모두 채취했다. 그 결과 금고 주변과 서류 봉투에서 채취한 지문과 특징점(지문 곡선이 끊어지거나 갈라지는 위치에 찍는 표시점)이 7개 일치하는 지문을 가진 선원 1명을 찾아냈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12개 이상 특징점이 일치해야 동일 지문으로 판단하고 있다.

선장은 흥분했다. "이 사람이 범인입니까?" 그 남자의 대답은 '그렇다, 아니다'가 아니었다.

"제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오늘 확인된 사실과 확보된 증거는 당신에게 모두 넘기겠습니다. 자백을 받아내거나 체포를 하는 건 수사기관이 할 일입니다."

'그 남자'는 유우종(49) 한국민간조사협회 회장이다. 그의 직업은 '민간조사관'. 흔히 '사립탐정'이라 한다. 그는 범죄 혐의를 밝혀내는 데 필요한 온갖 조사를 다 하고도 수사기관에 나머지 일을 맡긴 채 선을 긋는다. 거기까지가 민간조사관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민간조사관, 셜록 홈스 아니다

터키 화물선 선원의 지문을 채취하는 모습. 민간조사관은 상대방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 유우종씨 제공

"민간조사관은 '소설 속 셜록 홈스'가 아닙니다."

김종식(63) 한국민간조사학술연구소 소장은 "민간조사관이 하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탐정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부정적 이미지부터 걷어내야 한다"고 했다.

'사립탐정'이라고 하면 소설이나 영화 속 탐정부터 먼저 떠올린다. 그들은 타인을 수시로 미행·염탐하고, 필요에 따라 납치나 감금도 한다. 때론 범인을 협박하거나 직접 유죄 여부를 판단해 체포하기까지 한다. 김 소장은 "이는 철저한 오해"라면서 "민간조사관은 합법적으로 수집한 증거를 토대로 확인한 사실을 의뢰인에게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지난 15일 만난 유우종 회장은 한 유명 가구 기업 법무팀의 의뢰를 받아 경기도 수원의 한 가구 업체를 조사하고 있었다. 상표를 무단 도용해 만든 소위 '짝퉁' 상품 판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조사 과정은 은밀하거나 위험하지 않았다. 유 회장은 가구를 구경하는 척하다가 "사진을 좀 찍어도 되겠느냐"고 물어 업체 사장의 동의를 구한 뒤 도용 상표를 하나씩 촬영했다. 법무팀은 유 회장이 수집한 증거를 넘겨받아 소송 자료로 활용할 예정이다.

민간조사관의 업무는 이런 지식재산권 침해 조사 외에도 산업 스파이 색출, 교통사고, 보험 범죄 조사, 해외 도피 사범 추적 등 다양하다. 대부분 증거를 수집하고 이를 통해 사실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의뢰인은 국가 수사기관부터 기업 법무팀이나 변호사, 언론 노출을 우려해 수사기관에 사건 맡기기를 꺼리는 연예인과 정치인 등 다양하다. 그러나 흥신소나 불법 심부름센터로 오인한 이들의 황당한 의뢰도 많다. 유 회장은 "'사람을 죽여달라'거나 '특정 이성(異性)을 찾아 달라' 등의 의뢰가 40% 정도 되는 것 같다"며 "이런 의뢰는 단칼에 거절한다"고 했다.

민간조사관이 수집한 증거는 뒤바뀐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로잡기도 한다. 지난 2010년 9월 충북 진천의 한 국도 하행선을 달리던 대형 승합차가 중앙선을 넘어 상행선의 소형 승용차와 정면으로 부딪쳤던 사고가 그 예다. 이 사고로 승용차를 몰던 운전자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러나 이 사고를 맡았던 수사기관은 승합차가 아닌 승용차가 중앙선을 넘었다는 정반대 결론을 내렸다. 당시 유족으로부터 조사 의뢰를 받았던 유 회장은 이 억울한 사연의 전말(顚末)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고 현장을 찍은 사진을 보니 정말로 승용차가 중앙선을 넘은 모양새였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죠. 차량 파편들이 마치 수직 낙하한 듯한 모습으로 떨어져 있었거든요. 보통 사방으로 흩뿌려지기 마련인데…. 또 주변엔 난데없는 모래가 뿌려져 스키드 마크와 차에서 흘러나온 기름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의구심을 품고 현장 반경 7m를 자세히 조사했더니 두 차가 발견된 곳에서 2m쯤 떨어진 지점의 아스팔트가 1.5㎝가량 파인 흔적이 발견됐어요. 차량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차량 견인고리에 파인 흔적이었죠. 결국 목격자를 찾아 헤맨 끝에 '지게차로 두 차량을 옮기는 것을 봤다'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놀랍게도 사고를 낸 승합차 운전자가 지게차를 불러 사고 현장을 꾸민 것이었습니다."

경력이 15년에 이르는 40대 중반의 민간조사관 A씨는 해외 도피 사범 추적 업무를 전문적으로 해왔다. 검거된 도피 사범의 보복 등을 우려해 익명을 요구한 그는 "국가기관의 의뢰를 받아 주로 필리핀·말레이시아·태국으로 도피한 이들의 소재를 파악해왔다"며 "현지에 구축해 놓은 인맥을 바탕으로 증거를 수집해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A씨는 "민간조사관 활동을 하다 보면 불법·탈법적으로 수집된 정보가 이용되는 경우도 있다"고 털어놨다. 5년 전 40대 여성에게 혼인빙자사기죄를 저지르고 말레이시아로 도피했던 40대 남성의 소재를 파악할 때도 그랬다. 그 남성이 들렀던 카지노의 보안 책임자를 설득해 CC(폐쇄회로)TV 영상에 접근한 뒤 몰래 녹화를 시도한 것이다. A씨는 "국가 수사기관도 때론 불법·탈법적으로 정보를 수집해 논란에 시달리지 않느냐. 이 일도 하다 보면 실정법과 부딪치는 부분도 있다. 동남아에서는 위법을 알고도 넘어가 주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민간조사관 800여명 배출

도난 사고 현장에서 발견되는 지문은 중요한 증거가 된다. 사진은 분말을 이용해 터키 화물선 금고 주변에 남은 지문을 찾는 모습. / 유우종씨 제공

국내 처음으로 국제 공인 민간조사관이 된 사람은 유우종 회장이다. 그는 민간조사 분야의 선진국인 독일과 호주에서 민간조사관 자격증을 취득한 후 지난 2000년 국내 최초로 한국민간조사협회를 설립했다. 협회는 한세대와 경성대 평생교육원에 8주짜리 '민간 조사 최고 전문가 과정'을 개설하고 민간조사관을 길러 왔다. 기본적 법률 지식과 다양한 전문 지식을 가르치며, 교육 후 자격 검정 시험을 통과한 이에게 민간 자격증을 수여한다. 협회에 따르면 지난 2000년부터 지금까지 배출된 민간조사관은 모두 800여명. 이 중 3분의 1은 전직 경찰·검찰 수사관이다.

민간 자격증을 취득한 이들이 일하는 분야는 기업의 법무·인사·공정·감사팀, 변호사 사무실, 기업 리스크 담당 등 다양하다. 그러나 공인 자격증이 아닌 데다가 민간조사관 자체가 합법화되지 않았다는 점 등의 한계 때문에 '전업(專業) 민간조사관'으로 활동하는 이는 일부에 불과하다.

현재 OECD 국가 34개국 중 법으로 민간조사관을 인정하는 나라는 33개국. 우리나라엔 아직 관련 법이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민간조사관의 활동을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려는 노력이 계속돼 왔고, 그동안 관련 법안이 총 7차례 상정됐지만 모두 무산됐다. 사생활 침해 논란, 그리고 '경찰청과 법무부 중 누가 관리·지휘를 할 것이냐' 하는 '부처 간 힘겨루기' 문제 때문이다. 현재 19대 국회에도 관련 법안 두 건이 계류 중이다.

지난 2006년 민간조사관이 된 법무법인 정세의 이명재(51) 변호사는 "민간조사관과 협력해 증거를 수집하는 외국 변호사와 달리 우리나라 변호사는 의뢰인이 가져오는 증거에만 기대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한국의류산업협회 지식재산권보호센터에서 단속팀장으로 일하는 김서중(55)씨도 지난해 민간조사관이 됐다. 그는 "국내 수사기관은 과중한 업무로 한 가지 사건에 집중하기 힘들 경우가 많다"면서 "민간조사관이 합법화되면 장비나 인력 한계를 느끼는 수사기관에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합법화 논란

우리나라에서도 조만간 '사립탐정'이라고도 불리는 민간조사관이 정식 직업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지난달 "일자리 창출의 하나로 민간조사관을 육성·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부도 나섰지만 민간조사관 합법화를 둘러싼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대한변호사협회가 가장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대한변협 최진녕(43) 대변인은 "민간조사관이란 직업은 결국 흥신소나 불법 심부름센터와 같다"며 "'합법적 활동을 할 것'이라고 아무리 주장해도 업무 특성상 본질적으로 사생활 침해 위험이 있다"고 했다.

이와 관련, 김종식 소장은 "민간조사관에 대한 필요가 증가하고 있다"며 "민간조사관을 합법화하면 대한변협이 우려하는 일부의 불법·부당 행위 등도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