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8. 23. 23:56ㆍ내고향강진의 향기
여행일시: 2004년 06월 17일
무안 초의선사 탄생지를 뒤로 하고 다리를 건너 목포로 진입을 하였다. 갓바위로 가기 위해 영산하구둑 쪽으로 달려 갓바위 공원쪽으로 수월하게 달릴 수가 있었다. 항상 지나다니기만 하였지 막상 카메라에 담아보기는 처음인 것이 의아하다. 우선 해양유물박물관까지 갔으나 시간이 허락할 것 같지를 않아 그냥 돌려 갓바위공원 앞에 주차를 하고 공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공원으로 올라가니 의외로 찾아온 사람들이 적어 보였다. 위쪽으로 몇몇 쌍이 먼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박물관 앞에 모인 학생들의 모습으로 봐서는 이쪽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으로 생각이 들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한적한 모습을...
먼저 갓바위 공원을 돌아보고 뒤쪽에서 갓바위를 보니 전혀 감이 안잡힐 정도의 바위였다. 첫느낌으로 표현하자면 여자가 머리감고 있는 것 같은 그런 장면이었다. 다시 올라와 입구 쪽으로 내려가 갓바위 바로 앞 쪽으로 내려갔다. 원래길은 해변으로 돌아서 갓바위 앞 쪽으로 진입을 하는 것인데 위에서 내려오자니 위험천만이다. 혹시라도 술드신 분들이 내려오면 위험할 수도 있어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역시 앞에서 보니 장관이다. 이곳에서 보이는 바위가 큰삿갓 바위다. 마치 삿갓을 벗어놓은 모양이다. 아마도 그래서 갓바위가 되었을 것 같다. 그러나 배를 타지 않고서는 두바위를 한번에 볼 수는 없었다.
[멀리 국립해양유물박물관이...]
[박물관에서 건너다 보이는 갓바위공원...]
[건너편에 대불국가공단이...]
[왼쪽엔 영산호 휴게소 쪽도...]
[공원뒷쪽에서본 작은갓바위...]
[우미파크필 아파트단지...]
[갓바위공원 언덕...]
[갓바위공원 오르는 길목...]
갓바위에 대한 전설을 알아보면...."큰 바위는 '아버지 바위이고, 작은 바위는 '아들바위'라 하며 둘 다 머리에 삿갓을 쓴 형태지만 역시 아들바위의 삿갓이 보다 근사하다. 목포는 1897년에야 일본인들이 한국침략의 서남 거점으로 개항(開港)해 오늘날처럼 도시로 발전했다. 그 전에는 영산강하구(榮山江河口)를 지키는 보잘 것 없는 나루로 조그만 마을이 있었을 뿐이다.
이 갯마을에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병든 아버지를 모신 가난한 소금장수 청년이 살고 있었다. 그는 포구에 실려오는 소금을 받아 인접마을에 팔아서 끼니를 이어갔다. 가난하여 약 한 첩 제대로 쓸 수 없었던 청년의 아버지는 날로 병환이 악화되어 갔다.
청년은 안타깝기만 했다. 그는 스스로 큰 결심을 했다. 이번에는 아버지 약값을 충분히 벌어야 집에 돌아온다고 다짐했다. 힘에 겹도록 소금짐을 짊어지고 떠났다. 그러나 딱하게도 소금을 사려는 사람이 없었다. 빈손으로 집에 돌아갈 수 없었던 청년은 날품이라도 팔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부유해 보이는 길갓집에 찾아 들었다.
그 집주인은 소문난 구두쇠로 한 달 동안을 일하고 품삯을 달라는 청년에게, "그동안 먹여준 밥값도 못한 주제에 품삯은 무슨 놈의 품삯이냐"며 쫓아 버렸다. 아버지 약값을 구하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터라 길거리에 주저앉아 신세 한탄만 하고 있었다.
그 마을을 지나던 도승이 청년을 보고 무슨 걱정거리가 있기에 그리 한숨을 쉬느냐고 물었다. 청년은 자초지종 그의 처지를 말했다. 얘기를 들은 도승은 크게 낯색이 변하며 청년을 꾸짖었다. "청년은 한가지만 생각했지 깊은 생각이 부족했네, 자네가 약값을 마련하겠다고 타향을 전전하고 있는 동안 병든 아버지는 누가 돌보았겠으며 그동안에 죽었다면 애써 약값을 마련했다 한들 무슨 소용있겠나" 그때서야 병든 아버지를 생각한 청년은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돌보는 이 없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 청년은 그의 어리석음이 한없이 후회스러웠다.
이승에서 편히 지내지 못한 아버지이지만 저승에서나 편히 쉬게 하는 것이 그의 도리라 생각하고 관을 메고 명당을 찾아 나섰다. 갓바위는 옛부터 말형국으로 명당이 있고 안장터가 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산을 헤매던 청년은 지금의 갓바위 곁에서 앞을 바라보니 시원하기가 그지없고 양지바르므로 이곳에 묘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관을 바닷가에 놓고 묘자리를 파던 청년은 그만 실수를 저질러 곁에 둔 관을 건드렸던지 관이 데굴데굴 굴러 바닷 속으로 첨벙 빠지고 말았다. 넋을 잃은 청년은 행여 관이 떠오르지 않을까 기다렸으나 영영 떠오르지 않았다.
바다를 내려다 보면서 엉엉 울던 청년은 하늘을 쳐다볼 수 없는 놈이라며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았다. 지금 이곳은 이(李)씨 집안의 선산이 되어 여러 개의 묘가 들어서 있다."고 전설을 들을 수 있다. 그렇고 보니 정말 애틋한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아쉬워하며 자료를 찾아 바다에서 찍은 두바위를 다 보았는데 아들바위는 정말 갓이 손상되질 않아 갓을 쓰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선명했다. 그런 줄 알았으면 큰 바위 위로 넘어가 작은 바위를 찍어볼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큰갓바위의 위용...]
[온갖 풍파를 이겨온 큰갓바위...]
갓바위를 한 바퀴 돌아본뒤 목포의 백산집으로 방향을 잡았다. 철학관을 하고 있는 웹친구이자 또 산악회의 회장이기도 하다. 잠깐 친구를 만나고 식사를 한뒤 많은 이야기도 못나누었는데 손님이 오셨다. 우리는 이내 안녕을 고하고 또 강진의 바닷길을 헤메기 위하여 2번도로를 힘차게 달려갔다.
영산강 하구둑을 지나 고속도로같이 잘 다듬어진 국도로 강진까지 달렸다. 강진읍내를 지나려니 "영랑시인생가"라는 밤색표지판이 우리를 부른다. "강진을 다녀와 청자도요지와 영랑생가를 지나쳤다면 무었을 보았다 하리오?" 하는 글귀가 생각이 났다.
표지판을 따라 동네어귀로 접어들어 작은 언덕을 오르니 작은 주차장과 생가가 보인다. 뒤쪽은 산이지만 주위환경은 학교와 연립주택들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느껴지었다. 생가에 들어서니 아직은 복원의 티를 벗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텃밭이나 또 안채의 모습들 그리고 시 속에 나오는 우물과 장독대 그런 것들을 눈으로 대하니 새삼 반가운 느낌을 갖게 된다.
[영랑생가입구...]
[영랑생가내 털동자꽃이...]
[영랑생가 사랑채...]
[...]
[영랑생가 안채...]
[영랑생가 마당의 남근석...]
[영랑생가내 우물...]
[영랑생가내 장독대...]
[영랑생가 사랑채...]
[영랑생가내 석류꽃이...]
[영랑생가내 메꽃도...]
[영랑의 초상...]
"영랑시인은 1903년 강진읍에서 지주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모친의 도움을 받아 단신으로 상경 이듬해 기독교 청년회에서 영어를 배웠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기미독립선언문'을 감추고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운동을 주도했으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경찰서에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뤄야 했다.
그 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중학부에 다닐무렵 혁명가 박렬과 같은 방에서 하숙을 했었고, 귀국한 이후에는 평생의 지기인 용아 박용철 등과 교류를 하면서 최초의 동인지 '시문학'을 만들었다.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며 괴테, 로제티, 키츠 등을 탐독하여 서정의 세계를 넓혔다. 휘문고 시절에는 축구선수를 지낼정도로 운동을 즐겨했으며, 본가에 테니스코트장을 마련해 놓고 운동을 했다. 또 동서양의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아악을 정통하고 북으로 이름이 알려지고 거문고에도 심취하는 등 이러한 음악에 심취했던 것이 뒷날 그의 시세계의 독특한 언어에 표현되어 나타났던 것은 아닐까? 박용철, 정지용 등과 시문학 동인으로 활동할 때 발표한 시로는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쓸쓸한 뫼 앞에'등의 서정시를 발표했다.
이후 '내 마음 아실이', '모란이 피기 까지는' 등의 대표적인 주옥같은 서정시를 발표했고, 1935년 제 1시집인 영랑시집을 간행했다. "그의 시 세계는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한 것으로 정지용의 감각적 기교, 김기림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다른 순수 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일제 말기에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해 항일정신을 보여주었으며, 8.15광복후에는 민족운동에 참가하는 등 영랑시인의 시 세계와는 다른 주지주의적 경항을 보여줬다. 영랑시인의 문학적 세계는 일제치하에서 설움받는 민족의 한을 시로 표현하고 그의 젊은 정렬과 민족의 기상을 은연 중 문학을 통해서 불살랐던 한국 현대문학의 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순수 서정시의 한국적 모범을 보여 한국 시사에 큰 영향을 끼친 선구자라 불릴 수 있다.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시인의 순수 서정시를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어졌다. 1950년 6 · 25사변이 발발하자 함께 근무하던 공보처 직원들로부터 피신하라는 연락을 받았으나 피난길에 미쳐 오르지 못하고 그해 9월 29일 포단의 파편을 맞아 사망했다." 고 쓰여져 있다.
[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전문...]
[영랑생가내 비비츄...]
[부처꽃에 나비가...]
강진의 영랑생가를 돌아보고 비가뿌리는 날씨에 그래도 컴컴해지기 전에 마지막 구간인 강진 관산구간을 완주하려 부지런히 2번도로를 마다하고 23번 도로를 갈아탔다. 이곳에서부터 읍내를 벗어나 목리교를 건너 송로로 해서 강진만의 우측해변도로가 시작되는 곳이다. 우선 우측에 멋진 만이 펼처지는 것을 목격하였다.
팻말에는 구로리라 쓰여있다. 조금더 간후 우측길로 들어서 송호분교를 지나 산모퉁이로 만들어져 있는 해안도로를 이용해 뒤로 한 바퀴 돌아 나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은 공사 중이라 방조제길을 이용할 수 가 없었다. 다시 돌려 나와 표지판에 적혀있는 대구면 도요지를 찾아 내려갔다.
[고바우 상록공원 상징석...]
강진만의 해안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지점이다. 우측으로 만덕산과 수양산, 주작산 등이 보이고 멀리 가우도가 보인다. 가우도의 면적은 총 0.22제곱km로 13세대 46명(2000년)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는 작은 섬이다. 여기서 300m 떨어진 곳에 사당리의 고려청자 도요지(국가지정 사적 68호)에서는 매월 7월말 강진청자문화제가 열려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청자박물관 에서는 고려청자의 제작과정과 기원을 알 수 있고, 고려청자도 구입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국보와 보물급 청자중에서 약 80%가 이곳 강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인근에는 마량면의 천연기념물 마량항 까막섬, 강진읍의 영랑 김윤식생가, 바다 건너편의 도암면 마덕산의 사적 제 107호 정다산유적지, 지방유형문화재 백련사 등이 있다." 고 안내판은 우리에게 전해준다.
[양이정(養怡亭)이라 쓰인 전망대현판...]
[고바우상록공원에...]
멋진 풍광이 벌어지는 전망대를 보고 조금 달려 내려가다 다시 우회전 바닷가로 들어갔다. 이쪽으로 자동차 도로는 없지만 멀리 경운기를 타고 돌아오는 어민들을 볼 때 한줄로 귀가하는 그모습이 너무도 그림같은 장면이기에 한참을 달려들어갔다.
그러나 아직은 출발할 시간이 멀은 것 같이 느껴졌다. 청소들도 하고 또 옷들도 갈아입고 하려면 오래 걸리는 모양이었다. 할 수 없이 선발대로 달려나오는 한 대의 경운기와 뒤에 타고 오시는 주민들을 한컷하고 다시 직선으로 만들어진 농로를 따라 새로 만들고 있는 다리밑으로 겨우 갈 수가 있었다. 이 하천 이름을 보니 대구천이라 쓰여있다.
다리를 통과한 후 공사 중인 길로 올라서니 23번 도로와 이어진다. 직진을 하면 정수사라 쓰여있고 대구면 도요지는 바로 윗길로 올라서면 조금 되돌아 가 도착을 할 수 있었다. 이곳에 도착하니 고려청자의 온상지 답게 커다란 단지화 되어있는 각종 도자기 직판장들과 또 크게 또는 작게 체험을 할 수 있는 그런 터들을 제공하는 공간들이 잘 마련되어있는 곳이다.
좌측에 대구면 강진청자도요지라 쓰인 곳에 주차를 하고 매표소로 달려가니 시간이 늦어 들어갈 수가 없다 한다. 겨우 바리케이트사이로 들어가 내부사진 몇장과 도요지등 흐리고 늦은 날씨지만 섭섭하지는 않게 돌아볼 수가 있었다.
[대구면 강진청자도요지...]
[도요지 안에 조형물들이...]
[대구면 도요지 안내도...]
[고려청자 조형물...]
[조형물...]
[고려청자 가마터...]
우리가 고려청자 하면 탁한 연초록색의 도자기를 생각하게 되고 또 그도 자기에 하얗게 새겨진 아름다운 무늬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들의 약 80%가 강진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라는 점에 가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제 날씨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하며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부지런히 가야 마량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마량의 까막섬이 둘이 마주보고 있는 그림을 본적이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지만 오늘은 그져 볼 수만 있어도 다행이라 생각하며 달려갔는데 까막섬은 의외로 가까운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니 너무도 복잡스럽고 차량도 통과가 힘든 그런 선착장 앞에 나란히 있는 것이 아마도 까막섬인 것 같다. 너무 비가 많이 오며 또 어두워 잘 보이질 않을 정도이라 지도를 보니 지도엔 대오도, 소오도라 쓰여져 있었다. 앞 쪽으론 고금도가 커다랗게 막고 있어 섬이라기보다는 육지간의 선착장기분이 나는 곳이다. 이곳에서 조금 돌아 나가니 관산으로 가게 된다. 너무도 생각이 많은 곳이다. 작년 사고를 당해 장흥병원에 입원하고 그 와중에 차를 끌고 남동진으로 해서 안양으로 해안선을 돌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사고 없는 여행과 건강한 삶이 제일이라는 생각을 다시한번 해보며 이번 여행을 끝마친다. -<끝>-
- 글 /그림- [김영윤의 여행보따리]
'내고향강진의 향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천리 길 끝에서 만나는 남도의 향기, 강진의 아름다움 속에서 (0) | 2006.08.23 |
---|---|
[스크랩] 고려창자 비취빛 닮은 백사마을-강진 (0) | 2006.08.23 |
[스크랩] 청자골 달마지마을 - 강진 (0) | 2006.08.23 |
[스크랩] 강진 해태식당 (0) | 2006.08.23 |
[스크랩] 다산 정약용은 정조의 `숨겨진 남자`였다 (0) | 2006.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