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강재일사와 용전사

2006. 8. 20. 08:05내고향강진의 향기

구한말 강재일사와 용전사 2005.04.04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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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onfucian school of Yongjeonsa

 

 강재일사는 1891년부터 1903년까지 매일 기록한 일기를 통해 한말 장흥․강진일대의 동향을 보여준 일기로 지방유형문화재 제206호이다. 강재(剛齋) 박기현(朴冀鉉, 1864∼1913)은 본관이 밀양으로 1864. 4. 22일 강진 옴천에서 출생하였다. 어린시절 옴천에서 병영으로 이사하여 갑오년 동학농민군이 병영을 점령하기 전까지 주로 그곳을 중심으로 생활하며, 가학(家學)을 통해 문리(文理)를 얻었다고 한다.

 1893년경부터 장흥 강진 일대에 널리 퍼지고 있던 동학을 금하기 위한 조처로 김한섭, 김병휘(金炳輝, 1842∼1903)등과 함께 향약계(鄕約契)를 조직하였으며, 한편으로 갑오년 당시에 동학농민군들의 폐정개혁활동을 저지하기 위한 유생들의 대응활동에 참여하였다. 1894년 장흥․강진 동학농민군에 의해 그의 삶의 터전이 되었던 병영이 초토화되고,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에 나선 동학농민군에게 형 장현(章鉉)이 체포되어 수난을 당하였으며, 종형(從兄), 창현(前 都正)이 갑오 12월 10일 병영 수성에 참가하였다가 순절하는 등 시련을 겪게 되자, 병영으로부터 작천면 용상리 구상마을로 이주한 후 강학에만 몰두하였다. 1910년 일본에 의해 국권이 상실되자 그는 마침내 울화병을 얻어 1913. 6. 1일 50세를 일기로 타계하였으며, 부안 임씨 량의 딸과 결혼하여 4남을 두었다. 그의 문집인「강재유고(剛齋遺稿, 1932년)」는 강진 향교의 전교를 지낸 바 있는 4남 윤 안 등이 중심이 되어 1988년에 간행되었다.

 박기현이 남긴 일기는 1891년 7월부터 1903년 4월에 이르기까지 장흥 강진일대 향촌 사회의 동향과 함께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인근 유생들과의 교유관계, 특히 갑오년을 전후로 장흥 강진일대의 동학농민군과 관군의 동향 및 당시 전투상황 등을 소상히 알려 주는 자료로서 이 지방의 동학농민사를 규명하는데 결정적인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 책은 상․하 2권 2책으로 된 필사본(筆寫本)이다. 상권에는 1891년부터 1896년까지의 일기가 수록되어 있고, 하권에는 1897년부터 1903년까지의 일기가 수록되어 있다. 일사(日史)는 매일의 날씨를 시작으로 강재 자신의 하루하루의 주요한 일과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와 교유하였던 장흥․강진 일대 유생들의 이름과 관련 지명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1894년 당시의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풍부하다. 더욱이 1893년부터의 내용에는 장흥과 강진 일대에서 점차 세력화되고 있던 동학(東學) 포교 상황이라든가 동학의 확산에 따른 유생들의 대응 활동을 날짜별로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서, 장흥․강진 동학농민군 등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규명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강재일사가 역사적의미를 갖는 이유는 동학혁명 당시의 동학군의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는 역사적 자료이기 때문이다. 

 ‘강재일사’를 보관중인 용전사(龍田祠)는 작천면 용상리 용정마을 뒤편에 있다. 1939년에 의림들이 강재 박기현의 도덕과 문장을 흠모하여 그 강학소에 용전단(龍田檀)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여 문인들이 참배해오고 있다. 용전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현용재전(玄龍在田)의 뜻에서 용전사(龍田祠)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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