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8. 20. 08:03ㆍ내고향강진의 향기
충효의 양건당 황대중 | 2005.04.04 15: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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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neral Hwang, Dae-joong 용상리 구상(九祥)마을의 옛 이름은 구승(龜昇)이었다. 거북이가 용이 되어 승천하는 형국이라 하여 구승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원래 장수 황씨(長水 黃氏)가 이룩한 마을로써 황씨가 31대를 살아온 곳이다. 황대중은 1551년 장수 황씨 6세인 아버지 윤 정과 어머니인 진주 강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서울의 백동에서 태어났다. 증조부인 황 응이 영암군수로 부임할 때 함께와 살다가 임기가 끝나고 돌아갈 때 강진군 초곡면에 옮겨 살다가 얼마 후에 구상리로 이주하였다. 천성이 인자하고 효성이 지극한 황대중은 노모의 병환에 백약이 효험이 없자 자신의 왼쪽 허벅다리 살을 베어 끓여드려 모친의 병을 낫게 하였으나, 한쪽 다리를 절룩거리게 되어 사람들은 공을 ‘효건(孝蹇)’이라 불렀다. 30세 때인 1581년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효성에 감동한 조문객들이 10여리나 늘어섰고, 1589년에는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선조 임금은 당시에 이조참의이던 이후백에게 황대중이 어떤 사람인가를 물었으며, 정릉 참봉의 벼슬이 내렸으나 사양하고 근무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2년 전인 1590년에는 사종숙부인 황윤길이 일본에 사신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바닷길이 험난하다고 뱃길을 두려워 말고 귀국하여서는 올바른 보고를 올리소서.’라는 시를 지어 보내니 이는 임진왜란을 미리 예견한 일 가운데 하나이다. 1592년 4월 초순에 임진란이 시작되자 전라도에서 뽑힌 80여명의 별초군중 한 사람으로 서울에 가는 도중에 여러 차례 왜적을 무찌르고 4월 29일 영상이던 윤두수와 이항복의 마중을 받으면서 서울에 도착하였다. 5월 1일에는 왕을 모시고 동파역에 갔다가 나라의 신주를 서울에 두고 온 것을 되돌아가서 모셔왔으며, 영변에 이르러서는 왜장 3명의 목을 베었다. 1593. 5. 3일에는 김 완과 함께 당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의 향도관이 되어 분전하였으며, 병졸 300여명을 이끌고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였다. 이 후 조령에서 재종형인 병사 황 진(황 희 정승의 5대 손자)을 만나 ‘남하지마령우병사진상화(南下至馬嶺遇兵使進相和)’란 시를 지으니 아래와 같다. 큰 뜻은 충신 모신 곳에 있고 정신은 호랑이를 사로잡을 수 있다. 수천 년을 이어온 장순과 허원의 충절인데 그들이 죽은 회양성은 어디인고.
1594년 11월 거제도 싸움에서는 이 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분전하다가 오른쪽 다리마저 중상을 입어 양다리를 절룩거리게 되자, 이 순신 장군이 그를 보고 "과거의 다리는 효건(孝蹇), 지금의 다리는 충건(忠蹇), 두 다리를 함께 절룩거리니 양건(兩蹇)이로다."고 하였다. 그 때부터 그의 호는 양건당(兩蹇堂)이 되었다고 전한다. 전란 중에 ‘임진창의’와 ‘격왜일기’를 썼으며 그내용 가운데 이순신이 전쟁의 와중에 병을 얻어 오랫동안 고생을 겪었으며 모함으로 옥에 갇혔을 때에는 나라를 걱정하는 수십 명이 28일 동안이나 이순신을 다시 등용하도록 농성한 사실들이 기록되어 전해오고 있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 병마절도사 이복남(李福南)과 합세하여 남원 전투에 참전하였으나 신식무기로 무장한 왜군에 의해 남원은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황대중은 1597. 8. 16일 적탄에 맞아 전사한다. 황대중이 죽자 왜놈들이 글을 써서 ‘조선 인간들아 너희나라 충신인 절름발이가 세상을 떠났다.’라고 글을 써 붙였으며, 숨이 멎기 전에 달려온 김 완에게 시신을 말 위에 실려 보내달라는 말을 남겼다. 황대중이 세상을 떠난 뒤인 1597. 12. 4일에는 충무공 이순신이 제사 지내는 글을 지었다. 1600년에는 양건당의 큰아들인 정미가 충남 아산에 사는 이순신의 큰아들인 이 회를 찾아가니 ‘나의 아버지인 이순신이 아플 때는 그대의 아버지인 황대중이 기도를 올려 회복되게 하였고, 모함을 당했을 때에는 나라에 호소하여 나라를 위해 싸우게 하였으니 두 집안의 후손들은 먼 훗날까지 잊지 말자.’는 세의서(世義序)를 써주고 결의형제를 맺었다. 1605년 4월 16일에는 선무원종 2등 공신에 올랐다. 1606년에는 조카인 정욱이 남원순절기를 쓰고 1615년에는 오집균이 행장을 지었다. 1894년 초간 ‘양건당문집’이 전하며, 현재 남원의 충렬사와 작천의 충효각에서 제를 모셔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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