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평과 계동의 영계마을 / Village of Yeong-gye

2006. 8. 20. 08:37내고향강진의 향기

영평과 계동의 영계마을 / Village of Yeong-gye

 

 

             사진은 칠량면 사무소, 한 농가의 흙벽, 삼흥리 도요지 일원


 

 칠량면소재지를 지나 관산 방향으로 약간을 가면 야트막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영계마을이 있다. 영계마을은 크게 본 마을인 계동․영평동 그리고 새밭들로 나뉘는데 영평의 ‘영’과 계동의 ‘계’자를 따서 영계마을이라 칭한다. 마을은 할미봉․시루봉․족박뫼로 둘러싸여 있어 겨울철 추위를 막아주어 아늑하고, 마을 입구는 평야로 확 트여있어 여름철이면 남풍의 영향을 받아 시원하다. 이 일대는 장포리에서 보면 마치 구름 속에 달이 숨어 있는 형국이라 한다. 옛날 전국의 명당터를 찾아다니던 유명한 지관이 장포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이 마을을 바라보고 그 형국에 감탄했다. 그러나 마을 뒤 도암산(삼흥리와 경계)의 힘찬 줄기와 그 정기가 시루봉과 이어져 있지 않아 아쉬워했다고 한다. 영계 마을은 현재 미맥농사와 장미재배를 주업으로 생활하고 있다.

 

삼흥리 요지
 / Porcelain Site in Sam-heung and Soil in Gang-jin

 

 요지(窯址)란 자기나 기와, 그릇들을 만들어 굽던 가마터를 말한다. 이 곳 요지군은 삼흥 저수지 동남쪽 남산 마을 주변에 널려 있다. 삼흥리 산 71-1번지와 산 87번지(남산골)에 남아있는 요지 7곳을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81호로 지정해 관리해 오고 있다. 이 곳 요지에는 고려시대 10세기에서 11세기에 걸친 초기청자 요지군이 4개소, 고려토기 요지군이 3개소, 조선시대 15세기에서 16세기에 걸친 분청사기(粉靑沙器) 요지군이 3개소에 널려 있어,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걸쳐 다양하게 청자토기, 분청사기를 제작하였었다. 국립광주박물관 등은 지난 1999년부터 삼흥저수지 수몰지에 대한 지표 및 발굴조사를 실시해 토기가마 9기, 청자가마 5기 등 모두 15기의 가마터와 함께 청자, 백자, 옹기 등 다량의 유물을 발굴했다.

 옛날에는 도자기 가마에서 불을 땔 때에는 여자는 출입을 했다고 한다. 이유는 불을 때는 것은 가마라는 여성신이 흙을 옥으로 바꾸어 도자기를 분만하는 과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쁜 여자가 오면 여성신인 가마가 질투를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도공(사기장)이 그릇을 빚는 일은 흙을 가마라는 자궁과 장작불이라는 잉태의 고통을 통해 옥으로 바꾸는 신성한 작업이다. 심산유곡의 좋은 흙을 찾아서 밟고 물레를 돌려 장작불을 때서 만드는 것이 도자기이다. 이 때문에 도예는 흙일하는 노동의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조각가가 돌을 보고 형상을 찾아주는 자라면 도공은 흙을 보고 흙 고유의 색깔을 도자기로 만들어 주는 자이다. 다시 말해 도공은 흙의 창조적인 힘을 끌어내는 자이다. 우리나라에는 각 지역마다 독특한 흙이 있어, 우리의 옛 도공들은 인근의 흙을 파다가 도자기를 빚었다. 그리하여 지방마다 독특한 도자기를 빚을 수 있었다.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은 곧 비취색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비취색은 강진에서 발견된 청자 파편을 분석한 결과 고려청자 비취색의 비밀이 바로 `강진 흙'에 있음이 주장되었다. 최근 한국과학재단의 지원으로 강진군 고려청자사업소와 함께 연구를 실시해온 전남대 김화택 교수는 ‘청자 비취색의 비밀은 유약도 유약이지만, 유약층 밑에 숨어 있는 태토층에 있다. 이 태토층을 이루는 토질의 성분에 따라 비취색이 결정된다.’고 한다. 강진지역 흙은 많지도 적지도 않은 철이온이 포함돼 있으며, 이 철이온이 청색빛을 선별적으로 흡수하면서 전형적인 비취색을 나타낸다. 강진 지역의 흙은 수십만 년을 거쳐서 조성물질이 섞여 왔기 때문에 단시간 내에 강진의 흙성분을 모방할 수는 없다. 결국 지금의 기술수준으로서는 강진지역의 흙을 이용하지 않고 청자를 재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결론이다.


옹기놀이와 흙을 치는 노래 / Song of the Beating soil

 

 고려시대 도공들의 생활상과 애환을 노래한 이 놀이는 청자와 옹기의 생산 본고장인 칠량, 대구 지방의 옹기와 청자 제조과정에서 유래한다. ‘옹기놀이’의 경우 흙다짐이질을 하는 장면과 물레를 발로 돌리며 성형하는 과정, 가마에 옹기를 쌓은 후 제물을 차려놓고 소성(燒成)의 성공을 기원하는 제(祭)를 지내는 과정, 완성된 제품을 배에 싣고 판로를 찾아 출항하는 장면으로 구성된다. ‘청자놀이’의 경우는 옹기와 같은 제조 과정을 거친 후 초벌구이를 하여 유약을 바르고 가마에 넣어 본벌구이로 완성하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청자와 옹기의 제조방식에 따라 나름대로 그 특색을 지니면서 부르는 콧노래와 전래가사를 통해서 옛 도공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다음은 그 ‘흙을 치는 노래’의 가사 내용이다.


 어와 대해야 흙 방아야 / 어와 대해야 흙 방아야

 앞집네 뒷집네 일어들 나소 / 깊은 골에 옥토 캐어

 어서 어서 다듬으세 / 어와 대해야 어와 대야

 볼품없던 저 흙덩이 / 이리 치고 저리 치니

 명주 같은 흙이 되서 / 힘껏 치소 힘껏 치소

 어와 대해야 흙 방아야 / 떡가루가 되거들랑

 물레 위에 안아두고 / 삼대 독자 달래듯이

 어린 색시 얼르듯이 / 안고 싸고 다듬으면

 곱디고운 자기 되네 / 어와 대야 어와 대해야

 저기 좀 바라 보소 / 우리 집 여편네 걸어오네

 이 서방네 술 참 들고 / 이리 뒤뚱 저리 뒤뚱

 어절시구 힘이 나네 / 어서 치세 어서 치세

 어와 대해야 어절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