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량면(Chil-ryang)/ 옹기와 연안수산의 메카

2006. 8. 20. 08:36내고향강진의 향기

칠량면(Chil-ryang)/ 옹기와 연안수산의 메카 2005.11.11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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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꽃으로 유명한 칠량면 전경 / Chil-ryang with a field of roses

 
 

옹기 도요지와 장미재배 단지

                              / pottery and roses in Chil-ryang  

 

 강진읍에서 군동 삼신3거리를 지나 마량방면으로 가자면 금사봉 아래 송산 마을부터가 칠량면이다. 철새의 보금자리인 바닷가와 죽도․봉황옹기․송정리 지석묘군․삼흥리 도요지․단월리 장미재배단지와 염 걸 장군 유적지가 있다.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에 ‘칠량소(七良所)라는 기록이 있으며, 소(所)는 여말선초에 이 지역이 상공업 지역이었음을 뜻한다. 포구의 기능을 맡은 곳으로는 장계리 장포와 구로마을을 들 수 있으며, 가장 오래된 곳으로는 삼흥으로 추정된다. 삼흥리 같은 내륙 하천을 이용 시엔 뗏목이나 통나무로 만든 배를 이용하였으리라 생각된다.

특산물로는 바다에서 생산되는 바지락, 고막, 맛, 대합 등의 해산물과 봉황의 옹기, 장미수확량 전국 3위인 장미화훼단지, 표고버섯 등을 들 수 있다.

 

 

칠량면소재지에서 본 강진만 / Gangjin bay at the Chil-ryang

 

생거칠량(生居七良)의 유래

                                   / living in Chil-ryang at present 

 

 칠량이라는 지명은 「경국대전」(1388∼1484)에 따르면, 탐진현에는 물건을 만들어 납품하게 하는 공장이나 사람으로 야장(冶匠) 1곳, 시인(矢人) 1곳, 지장(紙匠) 1곳, 목장(木匠) 1곳, 피장(皮匠) 1곳, 유구장(油具匠) 1곳, 칠장(漆匠) 1곳 등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실제로 칠량에는 야장에 관련된 곳으로 율변의 불뭇골, 학동의 야철지가 있었고, 칠장에 관련된 곳으로 칠전(漆田)이라는 옻나무를 재배하는 밭이 영계마을에 있었다. 시인(矢人)과 관련된 곳으로는 병영성에 화살을 만들어 바쳤다는 죽도(竹島)를 들 수 있으며, 옹기 굽는 곳으로는 봉황·사부·명주·목암 등이 있었다. 이 밖에 칠량이 오곡과 어염(魚鹽) 등이 풍부한 곳임은 ‘생거칠량 사거보암(生居七良 死去寶岩)’이라는 고사에서도 알 수 있다.


송산마을과 칠량의 찰옥수수

                               / the sticky cornfield in Chil-ryang

 

 

금사봉을 병풍처럼 두른 송산마을 / Songsan-ri and mt. Geumsabong


 탐진만을 끼고 길게 뻗은 칠량은 옹기와 바지락이 많이 나는 곳이다. 칠량의 첫 관문인 송산은 간척지를 막기 전 이 마을 앞은 갯벌이 상당히 발달해 있었을 것이나, 해방 후 간척사업으로 인해 쌀농사를 위주로 하고 있다. 최근 들어 이 마을 앞 간척지에서는 겨울 보리농사 대신 찰옥수수를 재배해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일조량이 많은 강진만의 옥수수가 맛이 좋다고 신문과 TV 방송에 소개되면서 외지에서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 농한기 효자노릇을 하는 셈이다.

 이 옥수수는 한번 심어 놓으면 병충해에 강하고 잔일손이 많이 들지 않을 뿐 아니라 봄철 땅을 그냥 놀리기 보다는 옥수수라도 심어서 소득을 올린다는 취지였다. 1996년부터 농업기술센터의 지도 아래 비가림하우스, 터널재배, 멀칭기법 등으로 생산되는 찰옥수수는 강진에서 75ha 가량 재배되고 있으며, 신뢰도 제고를 위해 규격포장재를 사용하는 등 찰옥수수 재배면적을 늘리고 있다.

 

 

칠량의 찰옥수수 / the sticky Cornfield of Chil-ryang

 

 강진의 찰옥수수는 풍광이 좋은 강진만 친환경 지역에서 생산되어 나오기 때문에 식이섬유가 많아 그 맛이 좋고 대장질병 예방 등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옥수수는 2월초에 비가림 시설하우스에서 모종을 옮겨 심은 뒤 친환경농법으로 재배되어 100일 만에 수확을 하고, 30개들이 한 포대에 1만5천원에서1만7천원에 백화점 대형마트 등에 팔리고 있다.


구로마을의 맛과 대합 / the clam in Gu-ro

 

 철새들의 낙원을 이루는 강진만의 조망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 구로 마을이다. 이 마을은 농업보다는 어업이 위주였으나 현재는 간척지 개간과 이농현상으로 젊은 사람들보다는 중년이후 노인들이 더 많다. 이 마을의 포구는 조선조 임란을 전후로 구로의 서쪽에다 나루를 설치하였고, 그 이름을 계량진(桂梁津)이라 하여 1800년경까지 이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며 항구와 함께 객주가 설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구로마을 앞 바다의 강진만 / Gangjin bay at Gu-ro

 

 구로는 바닷가 마을로 해산물이 풍부하다. 여기에서 생산되는 ‘맛’은 자연서식을 했는데, 종패를 뿌리지 않는 자연소득이어서 불로소득이 되고 대합도 많이 생산되었다. 옛날에는 임금님한테 이 강진만 대합을 진상했다고 한다.


마을 수호신 벅수와 중흥 마을

                                   / a totem pole in Joong-heung

 

 칠량면 흥학리 중흥 마을은 후등이 소의 멍에 형이라서 ‘가치(駕峙)’또는 ‘가재’라 불렀는데, 1938년 중흥으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칠량 월송에서 중흥으로 가자면 ‘벅수개’라 불리는 마을의 입구 벅수고개에는 밤나무로 만든 벅수(장승)가 남여 한 쌍씩 모두 4기가 마을 수호의 상징으로 서 있다. 한 백 년 전만 해도 이 고개에는 일백여기의 벅수들이 길 양옆으로 늘어서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현재 4기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농촌 근대화 이후 오래 되어 썩은 벅수를 모두 철거했기 때문이다.

 이 장승은 1975년 마을주민 차인옥 씨가 조각해 세운 것으로, 고개의 양쪽에 나란히 서서 마을을 오가는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이 ‘할아버지・할머니 벅수’는 모두 민둥머리 형태로 얼굴 부위의 눈, 코, 귀, 입, 수염 등은 조각으로 표현했고, 전체적인 인상은 위압적이다.

 

 
 
칠량 단월리 한 가옥의 기와(액을 쫒는다는 치우천왕상)

 

 중흥 마을의 당산제는 매년 음력 1월 14일 저녁이면 모든 주민들이 벅수 앞에 모여 당산제를 지낸다. 최근에는 서울 향우들도 버스를 대절해 와, 이 당산제를 같이 지내면서 옛 추억을 되새긴다. 제를 마치고 마을 사람들은 음복을 하며 흥겨운 농악놀이를 벌인다.

 “이 당산제를 정성껏 모신 탓인지 중흥 마을은 일제 때나 6·25동란을 겪으면서도 다른 마을처럼 사람이 죽거나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콜레라가 창궐하던 시절에도 병에 걸린 사람이 없었지.” 마을 주민 차인옥 씨의 이야기이다. 사장나무는 원래 일곱 그루였는데, 태풍이 심하게 온 해에 한 그루는 넘어져 버렸다.

 장승에서 마을 앞쪽으로 약간 내려오는 곳에 ‘남생이 바위’가 있다. 도로 공사 중 포크레인으로 파 버려서 원 모습을 상실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 마을은 상당히 부촌이랄까, 밥을 먹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건넛마을 율변 장수가 ‘남생이 주둥아리가 율변을 보고 있어, 남생이가 율변에서 먹고 똥을 이 쪽(중흥)으로 싼께, 그 쪽(율변)이 가난하고 중흥이 잘 산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장수가 즉시 이 바위를 들어 궁둥이를 율변쪽으로 향하게 위치를 바꿔 버렸다. 그런데 이 장수가 이후 병이 났다. 율변마을 사람들도 하나 둘 아프기 시작하고, 귀신이 씌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앓아누웠는데 용한 점쟁이한테 가서 점을 치니까, 점쟁이가 “혹시 최근 돌을 만진 적이 있느냐?” 하고 물어보니 그 남생이 바위를 만진 것이 생각나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니까 그 점쟁이가 말하기를 “당신이 아픈 것은 그 바위를 건드려서 생긴 병이니, 이를 원래대로 해 놓아야 아프지 않고 마을 사람들이 재앙을 받지 않는다”고 하여, 그 장수는 머리를 싸매고 와 바위를 들어서 원래대로 돌려놓게 되었고 이후 재앙이 없어졌다고 한다.

 

염 걸 장군과 율변 마을 / general Yeom-geol in Yul-byeon

 

 

염 걸 장군의 창의비와 두 소나무 / the monument Tower of general Yeom-geol


 율변이라는 지명은 전에 밤나무가 뒷산에 다수 있었다. 이 마을에는 호랑이가 나타나 피해를 입기도 했다. 그래서 마을 앞에 선돌을 세 개나 세워 호랑이의 화를 없앴다.

이 마을 출생인 의병대장 염 걸(廉傑, 1545-1598) 장군은 전 강진현감 김광준에게 수학하고, 동생 서와 함께 승마․궁술․검술을 익히고 육도삼략 등 병서를 통달하였다. 다음은 월파 정시림 찬(撰) 「퇴은당유사」에 실린 글과 현지답사를 통해 채록한 글을 구성한 것이다.

 염 걸은 어려서부터 천품이 뛰어나고 총명하며 단정하였다. 효심도 지극하여 이웃의 칭찬이 많았다. 어려서 “꽃에 나는 벌은 임금님의 기상이요 춤추는 나비는 임금님의 정일세”이란 시를 지어 주변을 놀라게 했고, 한번은 집에 도둑이 들어 양식 등을 훔쳐가는 것을 보고 여러 구실로 접근해서 도둑의 옷자락에 먹칠을 해놓아 후일 이웃마을에서 이 무례한 들을 검거케 하는 기지를 발휘해 이 지방에서 칭송의 표적이 되었다.

 무예에도 탁월하여 늘 아우인 서(瑞)와 경은 물론 아들 홍립에게도 병서를 강론하고 무술을 연마케 하여 부근에서는 4장군이란 말이 펴졌다.

 1579년 정유재란이 한창일 때는, 왜적선의 한 부대가 새벽안개를 뚫고 강진의 구십포를 향하여 항진해 오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염 걸은 아우 서와 경 그리고 외아들 홍립 등을 불러, "우리가 평소 무예를 연마하고 힘을 기른 것은 이러한 국난에 처했을 때 백성된 도리를 다하자는 데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겠느냐? 이제 국운이 불행하여 7년의 전란을 겪고 우리 강진에까지 적의 그림자가 침입했으니 이제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때다. 우리 다같이 나가 용감히 싸우자." 하고, 인근의 용감한 장수들을 규합하니 그 수가 3백여 명 이었다.  

 염 걸은 이들을 데리고 강가로 갔다. 강가에다 볏짚을 묶어 사람처럼 위장한 허수아비를 수백 개 만들어 쭉 늘어 세워 두었다. 드디어 적의 배가 나타났다. 염 걸은 화살에 편지를 매달았다. “이 곳에 염 장군이 있는 줄 너희들은 모르느냐?" 화살은 염 걸의 전단을 싣고 적병의 가슴에 직통하여 갑옷을 찢고 뼈를 뚫었다. 적은 이에 놀라 급히 도망을 쳤다. 장군은 적이 필시 도망갈 때 배를 버리고 산 속으로 숨을 것이라 생각하고 사람들을 인근 정수사에 매복시켜 놓았다. 과연 도망치던 왜적들이 정수사로 기어오르자 의병들은 일시에 달려들어 적을 완전히 소탕했다.

 장군은 이 싸움으로 부근 각 면과 읍의 피해를 막고 크게 이겼으나 아깝게도 외아들 홍립을 잃은 슬픔을 겪었다. 장군은 다시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 들어가 용감히 싸워 의병장이 되었으며 노량해전서 왜선 수백 척을 크게 격파해 3전 3첩의 공헌을 세우고, 뒤이은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워 관직이 수문장이 되었다. 공을 비롯하여 의병들은 더욱 분발하여 적을 무찔러 적병 수백을 죽이고 많은 전리품을 얻었다. 왜군이 장흥 회령진에 주둔해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는, 칠량에서 불과 20여리 떨어진 곳인지라 공격할 것을 계획하고 우선 의병을 몇 개 대로 나누어서 지형을 이용하여 요로에 매복케 하고, 스스로는 야음을 타서 적진에 불을 지르며 기습하여 많은 적병을 사살하였고 달아나는 적병들도 요소에 매복한 의병에 의해 섬멸됨으로서 이후 근처에서는 왜적의 준동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얼마 후 충무공 본영에서의 명령에 의해 공이 이끄는 의병이 영남 방면으로 진격하게 되었고 예교(曳橋)에서 적과 대전하여 세 번이나 싸워 큰 전과를 거두게 되자 이 충무공은 더욱 공을 칭찬하고 공에게 정병 300명을 더 주며 격려했다. 몰운대 싸움에서 왜장 두 명의 작전에 말려 이 충무공의 아들 면이 전사하였을 때 이 충무공이 비통해 하는 것을 보고 공은 용감히 출전하여 치밀한 작전술로서 적장 ‘마희움’을 사로잡고 송여종․송희립과 합세하여 나머지 적장 ‘마다치’를 생포해서 보고하니 충무공은 자식의 치욕을 씻었다며 공의 공로를 격찬하고 전과를 조정에 알리었다. 그 후 충무공과 함께 노량해전에 참여하여 적선 수십 척을 부수고 적장 1O여명을 살해하는 등 큰 공로가 있었으나 이 싸움에서 충무공이 전사하였다.

 이 충무공을 잃고 공은 허탈해지고 의병의 사기도 떨어졌으나 나라를 구한다는 사명을 저버릴 수 없어 의병들을 독려하여 곧 거제에 진주하여 적의 대군과 싸워 여러 번 전과를 올렸으나, 파상적으로 몰려오는 적군의 끈질긴 응전에 사력을 다하여 분전하다가 1598년 11월 적탄을 맞아 전사하니 향년 54세이다. 같은 날 아우 서와 경도 함께 전사하니 살아남은 모두가 이들의 충절에 고개를 숙였다. 공이 전사한 후 시신을 찾지 못하고 공의 옷과 신이며 의발 치아의 초혼으로 칠량면 단월리 율변(불무동, 佛舞洞)에 장사지냈다.

 

 

                       염 걸 장군의 묘소 / the tomb of general Yeom-geol

 

 1605년 왕은 장군에게 병조판서를 내렸으며 정문(충신집에 세워주는 붉은 문)을 세워 주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완도군 고금도에 있는 충렬사 승전비에 수록되어 있으며, 현재 칠량면 단월리 산 6번지에 사충(四忠)묘소가 있어   이 일대 유적지를 지방문화재 제36호로 지정해 보존하고 있다. 이 외에도 단월리에는 사충(四忠)순의비, 창의지, 생가터, 추모비, 상계묘역 등이 있다. 그 때 창의했던 자리에 자라고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는 만고의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어, 이 곳을 지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케 하고 있다.


전통 옹기를 굽던 봉황마을

                                 / Bong-hwang burning a pottery

 

 칠량면 소재지에서 마량 쪽으로 내려가다가 월궁마을에서 우회전 하여 1km쯤 들어가면 바닷가 어촌인 봉황마을이 나온다. 마을의 전체적인 지형은 봉황새가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마을의 뒷산이 머리, 본 마을은 몸통 부분, 덕동 앞산이 날개, 월궁은 꼬리에 해당된다고 한다. 또 대섬은 봉황새의 먹이가 된다고 한다. 봉황마을은 ‘독점’ 또는 ‘옹점’이라고도 불리는데, 우리 주위에 장독․김치독․쌀독․항아리 등으로 흔히 보아왔던 전통옹기가 생산되었던 마을이다. 옹기는 우리 조상 대대로 없어서는 안 될 생필품으로 어느 집에나 대문을 들어서면 장독대의 옹기가 보인다. 옹기는 음식 맛을 맛깔스럽게 하며 우리의 장맛 등은 옹기 속에 감추어진 비밀이었다.

 


                     봉황마을 옹기 굽는 집 / a pottery house in Bong-hwang

 

 예전엔 많은 가구가 옹기를 구웠는데, 지금은 아쉽게도 단 한 가구(정윤석 씨, 봉황옹기)가 남아 칠량 옹기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옹기장 정윤석(65세) 씨는 최근 전라남도 공예기술 무형문화재로 선정되었는데, 천직(賤職)으로 여겨져 온 독짓는 일을 천직(天職)으로 삼아 50여년의 외길을 묵묵히 걸어온 결과이다.

 이 곳 옹기가 삼흥리 도요지와 대구 청자도요지 등과 함께 성행했던 이유는, 이 인근에 찰지고 철분이 많은 흙이 풍부했을 뿐만 아니라 봉황리가 항구로써 옹기수송이 용이했던 이유도 있다. 이 인근의 점토를 채취하여 생산된 옹기는 사람에게 해로운 납 성분이 들어 있지 않으며, 그 안에 김치․간장․된장 같은 것을 담아 놓으면 맛이 변하지 않고 발효에 좋다. 즉 곡식이나 장류․과일 등을 옹기에 담아두면 식품의 보관기간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전래의 맛을 다시 찾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갖가지 장류나 장아찌, 김치 등의 보존식품 저장에 전통옹기의 쓰임새가 늘어나고 있다.

 이 곳에서 생산된 옹기는 주로 돛단배 등 목선에 실려 팔려 나갔는데, 순풍에 돛을 달면 제주도가 3일․강릉이 15일 걸렸다. 강진만을 출발해 동서남해안을 거슬러 전국을 다니면서 때로는 바람의 혜택도 있었지만, 태풍 등 풍파와 싸우기도 했다. 이로 인해 동네에서는 같은 날 제사가 많은데, 그 이유는 배가 침몰하면 배에 탄 일행이 같은 시각에 사망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칠량의 도자기는 대구면 청자도요지가 쇠퇴하면서 천태산을 넘어 삼흥리와 명주리 일대로 이동한 뒤, 흥학리와 장계리 해안을 거쳐 봉황리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칠량 봉황의 옹기는 대구 사당리의 귀족적인 청자에서 조선조 서민적인 백자를 거치면서 실용적인 옹기로 바뀐 셈이다.

 

 봉황의 옹기는 선대로부터의 전통방식을 고집하며 옹기를 빚고 있다. 인근 영동에서 채취한 흙을 반죽하는 것에서부터 물레질, 유약 입히기, 불 때기 등 모든 과정을 물려받은 방법 그대로 이어가고 있다. 항아리 등 옹기를 만들 때 흙을 쌓아가면서 벽을 두드려가면서 만드는 기술, 즉 ‘수레질’이라는 성형기술이 행하여진다. 정윤석 씨는 전통적 방법인 발물레를 이용해 옹기를 빚는다. 힘은 들어도 발물레가 섬세한 작업에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유약은 콩대나 메밀대를 태운 재와 황토를 일정비율로 물과 섞은 자연 잿물을 사용하며 가마의 온도를 1200℃까지 올려 옹기를 구워내기 때문에 재질이 단단하다. 점토는 주로 인근의 논에서 파왔는데, 가장 그 질이 좋은 곳은 영동마을 일대였다고 한다. 점토 운반은 처음엔 직접 파서 지게로 져 나르다가 나중에는 리어카로 나르고 1960년경부터는 소달구지를 이용했다. 땔나무는 칠량면 삼흥·명주·흥학·장계리 등지를 비롯하여 완도·해남·진도에까지 가서 구입해 사용하였다.

 

대나무 섬과 죽도귀범 / the island of bomboo

 

 

                               봉황마을 앞의 죽도

  

 

 봉황 앞바다 한가운데는 둥그렇고 거무스름한 섬이 하나 떠 있다. 무인도인 이 섬은 대나무가 울창하여 대섬(竹島)이라 부른다. 죽도(대섬)는 봉황마을 서쪽에 있는 섬으로 전죽(箭竹, 화살을 만드는 대나무)이 여기에서 많이 생산된다고 하여 부른 지명이다. 대섬의 전죽생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기록되어 있어 오랜 유서를 갖고 있다. 탐진만의 7개 섬 중 가장 위쪽에 자리한 이 섬은 주변 풍광이 뛰어나 금릉 8경 중 하나로 꼽힌다. 경회 김영근 시인의 한시 ‘죽도귀범(竹島歸帆)’이 그 것이다.


 아담한 섬 하나 대밭은 푸르렀다

 한가한 백조들도 삼삼오오 춤을 추네

 후젓이 젖은 비에 일엽편주 돌아오니

 누구라도 이 곳을 선경이라 아니하랴


 일설에는 일제시대에 강진이 부자고을임을 시기한 일본인들이 그 기(氣)를 죽이기 위해 죽도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착하여 폭파시키려 하였으나 주민들의 결사 저지로 무산되었다고 한다. 강진 출신 시인인 영랑과 현구도 이 죽도를 비롯한 탐진만의 섬들을 물 위에서 잠방거리며 노는 오리새끼들에 비유한 바 있다.


장계천의 백산과 장포마을 / the stream of Jang-gye

 

 

백산과 백산보 / mt. Baeksan and a dammed pool

 

강진 칠량에서 국도 23호선을 타고 대구 쪽으로 가자면 칠량 장계천이 나오고, 장계교 위에서 오른쪽을 보면 조그마한 돌산인 ‘백산’이 있다. ‘부엉이들이 똥을 싸 바위들이 하얗다’는 백산에는 봉황대가 있었다. 봉황대는 성전면 안운의 정선대, 장흥 관산읍의 삼가정, 병영면 용두의 용강정과 함께 해암 김응정 선생(1527∼1620)이 직접 지은 정자가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해암 선생이 시를 읊고 호연지기를 길렀다는 정자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홈내'로 불리는 장계천은 삼흥에서 발원하여 여러 마을 앞의 평야를 적시며 흘러내리다가 백산 아래 ‘백산보’ 부근에서 탐진만 바다와 만난다.

 ‘옛날에는 밀물 때 바닷물이 삼흥리 부근까지 밀고 올라갔다’는 칠량천은 은어의 서식지였다. 근래 들어 보의 설치와 상류 삼흥댐의 설치로 은어는 자취를 감추었다. 백산을 마주보는 장포 마을은 다섯가지가 풍부해 살기가 좋았다. 첫째는 옥토가 좋아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둘째는 소금도 짖고, 셋째는 밤도 나고, 넷째는 장계천(長溪川)이라고 맑은 물이 좋으니까 살기 좋고, 다섯째는 산이 좋으니깐 땔감이 많아 좋았다. 지금은 인근 바닷가를 간척해버려 해산물이 많이 나오지는 않지만, 아직도 동네의 부녀자들은 물이 빠지면 바다로 난 도로를 따라 바지락 등을 캐러 바다에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