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8. 24. 00:02ㆍ내고향강진의 향기
청기와쟁이의 근성이라는 말이 전해온다. 자기가 가진 은밀한 기술을 자기 자식에게도 알려주지 않고 죽어가는 이땅 고려청자 기술자들의 지독스러운 근성. 이 말은 고려청자를 만들며 살아온 도공들의 자기 기술 남에게 전수시키지 않으려 하는 멍청스러운 이기심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한국 도자기의 역사와 도공들의 비애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잘못된 말이다. 고려청자를 가리켜 비색(秘色)의 비색(翡色)이라고 한다. 제작의 비밀이 알려져 있지 않은 색깔인 비취색이라는 것이다. 박물관에 갈 때마다 나는 그 비색의 밥그릇 사발 찻잔 화병 주전자 향로 불상 따위를 넋을 잃은 채 바라보곤 한다. 이 땅 청자가 들어온 것은 통일신라 말기 중국 유학을 다녀온 선승(禪僧)들이 바랑에 넣어온 중국의 청자 찻잔이다. 중국에서는 9세기쯤 참선을 하는 선불교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방편으로써 차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청자찻잔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후 고려초에 우리 선인들이 청자를 국산화하였다. 이후 질 좋은 흙이 있는 전라도 강진 등지에서 고려청자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고려가 불교 세상이었으므로 고려인들은 그들의 마음을, 영원의 시공 극락 세계를 구름과 학의 문양으로 표현한 청자 그릇에 담았다. 불교적 선의 세계를 연못, 버드나무, 여유롭게 물살을 가르는 오리, 고요함과 적막함을 나타낸 들국화의 문양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한데 그 청자의 맥이 끊겼다. 그 까닭은 여러 측면에서 말할 수 있다. 첫째는 임진왜란때 일본군들이 도공들을 모두 끌고 가버린 것이다. 도예가들 사이에서는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말한다. 일본이 제2차세계 대전을 일으킬 정도로 부강해진 것은 조선땅에서 끌고간 도공들을 이용하여 만든 고려청자 때문이다. 일본은 그 청자를 유럽의 황실에 비싼 값으로 팔고 그 돈으로 근대적인 무기를 구입한 것이다. 둘째는 조선 사회에서 도공들이 사농공상 계급에도 끼지 못하는 천민이었다. 도공들이 사는 지역을 부곡이라고 했다. 도공들이 오죽이나 천한 대접을 받았으면 자기 자식에게 그 업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그 비밀한 제작 기술을 끝내 가르쳐주지 않고 죽어갔을 것인가. 고려청자에 대한 안목이 있는 양반 선비들은 도공들에게 아름답고 신비한 비색의 사발이나 향로나 화병이나 주전자를 만들라고 한다. 도자기는 먼저 그릇 모양새를 잘 만들어야 하고 유약을 잘 발라야 하고 가마 속에 넣고 잘 구어내야 한다. 불의 알 수 없는 작용에 의해서 뜻밖에 좋은 것이 나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불의 작용에 의해서 도공들 스스로도 예측하지 못했던 혼이 빠지게 할 만큼의 그릇이 나올 수도 있다. 한데 그것을 가져다 바치면 큰일이다. 양반들은 다시 그와 똑같은 것을 만들라고 한다. 도공은 다시 그와 같은 것을 만들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가마 속의 불의 온도나 그 온도를 유지시키는 시간의 정도가 알맞지 않으면 다시 그와 같은 작품은 나오지 않으므로 도공이 그와 똑같이 좋은 것을 가져다 바치지 못하면 양반은 화를 낸다. 그 도공이 자기에게 불만을 가지고 일부러 그러한 그릇을 만들어주지 않는 것으로 알고 끌어다가 곤장을 치게 한다. 이와같은 까닭으로 도공들은 자기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청자 제작 기술을 전수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천년의 빛 재현의 심혈. 그런데 그 고려청자를 재현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었다. 광주에 사는 남자였다. 그는 자기를 가리켜 고려청자에 미친 놈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학 졸업한 뒤 배낭을 짊어지고 이 땅 방방곡곡의 도요지를 더듬고 다니고 도요지 근처의 흙들을 채취해다가 실험해보고 유약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이런저런 조개껍질이나 짐승들의 뼈따위를 갈아 구워보았다. 그가 고현 조기정씨이다. 그는 오래전에 인간문화재로 지정을 받았다. 나는 사십대 초반 청자 재현의 광기같은 열정과 예술혼에 달떠 있는 한 도공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어 당시 월산동에 살던 조기정씨를 찾아가곤 했다. 그가 등가마에 그릇을 넣고 고사를 지내고 장작불을 지피기 시작하면 밤을 지새우며 막걸리에 취한 채 구경을 했다. 어느 여름날 그를 따라 강진 대구면 사당리 도요지를 찾아갔다. 그 도요지는 고려후기 청자 생산의 중심지로서 양질의 청자파편과 청자개와의 암막새를 비롯한 각 부위의 청자기와가 발굴된 곳이었다. 청자는 정선된 바탕흙에 비취색의 유약을 입힌 것이다. 이 땅에서는 12세기에 생산된 것에서부터 중국의 모방에서 벗어나 고려적인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곡선의 조형미를 지닌 것들. 섬세 부드러운 곡선 특징동물이나 식물 및 인물 모양의 청자에 입혀진 푸른색의 유약은 은은하고 안정감을 주는 반투명의 비취색이다. 고려청자의 그릇 형태와 유약의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 상감청자가 등장했다. 상감청자의 출현으로 고려청자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였고 유약은 얇고 투명해져서 파르스름한 유약을 통해 상감무늬가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그 청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릇을 만드는 바탕흙이 있어야 하고 비색을 나타낼 유약이 있어야 하고 그것으로 제작한 그릇을 환원염으로 구워낼 수 있는 등가마가 있어야 한다. 청자의 관건은 1,300℃ 이상의 환원염으로 구워내기에 있다. 환원염으로 구워내면 모든 것들이 다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것이 된다. 그 환원염이란 무엇인가. 몇 억년의 시간을 되돌려(환원해) 놓기이다. 지구는 태양처럼 뜨거운 불덩이였는데 물로 인하여 표면부터 냉각되었다. 속에는 새빨간 용암이 거듭 솟구쳤다. 그것이 식어서 단단하고 번쩍거리는 바위가 되었다. 그 바위가 풍화되어 돌맹이와 모래가 되고 그것이 다시 흙이 되었다. 이제 그 돌이나 흙가루를 이기고 버물러 그릇을 만들고 표면에 유약을 발라 가마 속에 넣고 산소 들어가지 않도록 하고 천삼백도 이상으로 열을 가하는데 이때 유약이 용암처럼 녹아 흘러 그릇 표면에 비색으로서 발리는 것이다. 1,300℃ 환원염으로 구워 그렇게 할 수 있는 옛 고려통가마가 1973년 강진 사당리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조기정씨는 강진군의 도움을 얻어 1978년 그 통가마를 본떠 강진요를 축조하였다. 이용희씨가 그 가마를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조기정씨와 이용희씨가 보여주는 고려통가마 원형과 청자의 파편들을 구경했다. 모깃불 속에서 수박을 먹고 수주를 마시면서 밤새도록 그들의 청자 굽다가 실패하고 성공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들은 고려청자의 재현하는 일에 미쳐 있었다. 그것은 한 물결의 운동이었다. 새로운 한국청자의 개발과 생산으로 옛 조상들의 훌륭한 도예기능을 다시 찾자는 운동. 조기정씨는 그때 이미 자기나름으로 고려청자의 비색을 재현할 수 있는 유약의 비밀한 조건들을 터득해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이용희에게 귀띔해 주었다. 청자재현 운동은 일제강점기부터 시도되어 왔지만 미미했고 그들 두 사람이 사실상의 큰 성과를 거둔 것이다. 조선조 관요, 백자 중심으로 발전했던 경기도 광주 이천의 도자기에 비할 바 아닌 지금 강진에 재현되고 있는 고려청자의 모든 영광과 번영은 그들 두 사람이 지른 불씨로 말미암은 것이다. 세상은 꿈꾸는 자들의 꿈에 의해서 바뀌어진다. 뽕나무밭이 짙푸른 바다로 바뀌어지듯 제자들을 이끌고 가서 강진 대구면 사당리 고려청자 재현의 현장을 견학시키고 돌아와 나는 입지전적인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면서 소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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