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월출산(813m, 전라남도 영암·강진)

2006. 8. 24. 00:03내고향강진의 향기

월출산(813m, 전라남도 영암·강진)

달 그리운 수석 전시장

정월 대보름이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달을 떠올린다. 그것도 산 위에 두둥실 떠 오르는 달을 말이다. 정월 대보름달을 보면서 나는 갑자기 월출산 생각이 났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월출산 천황봉에 둥근 달이 뜬다'고 노래한 '영암아리랑'이 생각났다. 비록 월출산에 떠오른 보름달을 볼 수는 없겠지만 월출산을 오르고 싶은 마음은 주체 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다른 산에 가려고 했던 계획까지도 취소하고 월출산을 찾기로 한 것이다.

기기묘묘한 바위에 걸린 보름달이 아름다워 월출산(月出山)일까. 그래서 월출산 기슭에 둥지를 튼 마을들도 달의 이름을 딴 명패를 달았다. 월산리, 월흥리, 월평리, 월강리, 월봉리, 월곡리, 월남리, 월하리, 월송리…….

또한 월출산이 자리잡고 있는 고장의 이름이 영암(靈岩)이니 이는 신령스러운 바위 덩어리라는 뜻이다. 결국 영암이라는 지명(地名)이 월출산의 바위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래서 영암 사람들에게 월출산은 정신적 상징이자 삶의 의지처인 것이다.

광주에서 나주를 거쳐 1시간여 달리니 불꽃과 같이 우뚝우뚝 서 있는 바위 봉우리들이 눈 앞에 다가선다. 월출산이다. 낮은 산과 드넓은 들로 이루어진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나주·영암들판 언저리에 월출산은 그야말로 우뚝 솟은 것이다. 이러한 들판 위에 군계일학 격으로 솟아오른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기에 충분한데, 거기다가 금강산을 옮겨다 놓은 것 같은 바위들이 온갖 모양으로 그 자태를 뽐내고 있으니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다.

월출산 북쪽 기슭의 천황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봄 기운이 완연하다. 매서운 바람은 그 끝이 이미 무디어져 버렸다. 봄을 기다려 왔던 새들의 지저귐도 활기차다. 암봉들을 한번 쳐다보고는 곧바로 산길로 접어든다. 잡목 숲을 지나자 신의대가 숲을 이루고 있고, 이어 바람폭포 가는 길과 천황사를 거쳐 구름다리로 가는 길이 갈린다.

갈림길에서 몇 발자국만 가면 천황사다. 말이 사찰이지 암자보다도 초라한 모습은 얘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볼품없는 기와집 한 채에 부처님을 모셔 놓았다. 절 뒤에는 왼쪽으로 장군봉이, 오른쪽으로 사자봉이 자리잡고 있다.

절 주위에는 신의대가 무성하고, 꽃망울을 터트릴 채비를 하고 있는 동백나무들이 봄을 재촉하고 있다. 점차 가파른 길이 이어진다. 가파른 길에다 날씨까지 포근하니 겨울 복장이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머리 위로는 매끈한 화강암 봉우리들이 분위기를 압도한다.

구름다리에 도착한다. 계곡(바람골) 쪽으로 갔던 사람들이 구름다리를 보기 위하여 가파른 길을 올라와서는 숨을 헐떡거린다. 암봉과 암봉을 잇고 있는 구름다리는 지상에서의 높이가 무려 120m에 이른다. 50m 정도 길이의 구름다리를 걸어가는데 아찔한 기분이 든다. 아얘 밑은 내려다보지 않고 걷는데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주위의 경관이고 뭐고 오직 빨리 건너고 싶은 마음 뿐이다.

구름다리 주위에는 갖가지 모양의 바위들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북쪽의 장군봉과 주위 연봉(連峰)들이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같다. 바람골에 자리잡은 바람폭포의 모습도 보인다. 폭포 위를 덮고 있는 커다란 소나무가 푸르를 뿐, 폭포는 텅 빈 겨울 모습 그대로다. 그냥 바위를 적셔주는 정도의 물이 겨우 체면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남쪽으로는 사자봉이 가파르게 솟아 있다. 암벽에 설치된 철계단을 타고 올라간다. 워낙 경사가 급하여 몸에 긴장이 풀어지지 않는다. 몇 년 전 겨울, 눈 쌓인 이곳을 오르면서 오금을 저렸던 기억이 새롭다.

고개를 이쪽으로 돌려보아도 바위 봉우리이고, 저쪽으로 돌려도 바위 뿐인 이곳은 온통 바위 세상이다. 하얀 바탕에 때로는 검은색으로 채색하고 가끔은 누르스름한 색깔을 추가한 바위들은 여백을 하늘색으로 채워 멋진 풍경화를 만들어 내었다. 바위로만 이루어진 산비탈에는 중간 중간 나무들이 자리잡아 부드러움을 더해준다. 바위가 양이라면 나무는 음이고, 바위가 하늘이라면 나무는 땅이다. 마치 음과 양, 하늘과 땅이 어울려 우주를 이루듯이. 옷을 벗어던진 나목들 속에서는 산죽들이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다.

사자봉 뒤쪽으로 천황봉이 모습을 드러낸다. 철계단을 오르다 구름다리 쪽을 내려다 보니 거의 수직에 가까운 벼랑이다. 내려다 보는 순간 현기증이 난다. 하지만 이런 스릴은 바위 산에서만 맛볼 수 있는 묘미가 아닐까?

구름다리에서 20분 정도 오르니 사자봉이 코 앞에 다가선다. 그러나 사자봉은 자신의 정수리에 사람이 접근하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사자봉 밑을 가파르게 내려간다. 몇 번 다닌 길이건만 혹시 길을 잘못 들지 않았나 착각이 든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이어지는 오르막이 이러한 우려를 금방 불식시켜 버린다.

사자봉을 지나자 왼쪽(남쪽) 금릉경포대 방향으로 뻗어내린 능선과 계곡이 펼쳐진다. 밑으로는 울창한 숲이, 위로는 아기자기한 바위들이 포근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부여해 준다. 경포대 계곡 아래에는 청소년 야영장과 태평양에서 운영하고 있는 넓은 녹차밭이 자리잡고 있다.

천황봉이 점점 가까워 오고 구정봉과 향로봉도 멀리 남서쪽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금릉경포대에서 땀을 흘리며 올라오는 몇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는 잠시 후 또 하나의 길과 합류한다. 바람폭포 쪽에서 오는 길이다. 천황사 바로 밑에서 갈라진 길이 여기에서 만난 것이다. 겨울이 가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눈이 잔설(殘雪)로 남아 뿌드득 소리를 내며 밟힌다.

인간이 항시 우러러보는 하늘. 그 하늘은 아무리 잡아보거나 만져보려고 해도 잡히거나 느낌을 주지 않는다. 항시 인간세상에서 멀리 있을 뿐이다. 이렇듯 하늘은 높고 범접할 수 없는 것이기에 조물주는 산을 지상에 내려 보냈는지도 모른다. 산은 하늘로 오르는 길목이요, 더 적극적으로는 손에 잡히는 하늘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늘을 만나러 산에 오른다. 산으로 통하는 문이 통천문(通天門)이다.

월출산 정상인 천황봉을 오르기 위해 통천문을 만난다. 이 문을 지나야 비로소 하늘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을 정도로 좁은 바위 굴, 즉 통천문을 지나 비로소 하늘에 닿는다.

넓고 평평한 바위에 하늘을 우러르러 많은 사람들이 와 있다. 말투를 듣고보니 전국에서 다 모였다.

"꼭 도봉산 같네."

"대둔산 같아."

각기 자기 지역에 있는 산의 모습을 비교하면서 한 마디씩 던진다. 하늘에 올라온 징표를 남기려고 사람들은 '천황봉'라 쓰인 표지석을 보듬고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다. 천황봉 표지석 뒤에는 '월출산 소사지(小祀址)'라 표기된 제단이 만들어져 있다. 이 소사지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통일신라 시대 이래로 국가에서는 전국의 명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왔다. 대사터 3곳, 중사터 24곳, 소사터 23곳 중 월출산 소사터는 유구(遺構)가 확인된 유일한 곳이다. 이곳 천황봉에서 발굴되었다는 통일신라시대의 토제향로와 토우편, 고려시대의 녹청자접시와 청자탁자편 등이 바로 그것이다.'

천황봉에서의 전망은 시원하다. 북쪽과 서쪽으로는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서쪽 들판 너머로 수명을 다해가는 영산강 물줄기가 넘실거린다. 영암읍의 모습도 한 눈에 들어온다. 동쪽에 자리잡은 월남리와 월남저수지의 모습이 평화롭다. 남쪽에서는 흑석산이 옆집에 사는 동생 마냥 가깝게 다가선다. 더 멀리는 덕룡산, 두륜산으로 연결되는 능선이 남해바다를 가로막고 서 있다.

주위 전망도 전망이지만 월출산이 품고 있는 봉우리들은 더욱 장관이다. 지금까지 지나왔던 북동쪽의 사자봉을 위시한 여러 암봉들은 급격한 경사와 협곡을 이루면서 남성적인 아름다움을 가져다준다. 이에 반해 여러가지의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로 이루어진 남서쪽의 구정봉·향로봉 등이 거느리고 있는 봉우리들은 아기자기한 여성미를 선사한다.

구정봉 쪽으로 향한다. 역시 급경사에 주로 바위 길이다. 불상 모양의 불상바위, 선비를 닮았다는 선비바위 등 여러가지 모양의 바위들을 바라보며 걷는 발걸음은 마치 조각 전시장을 둘러보는 기분이다. 구정봉이 점차 가까워 온다. 바람재 못미친 능선에서 바라본 구정봉의 바위 봉우리는 거대한 벅수나 장승 같기도 하고 로봇 같기도 하다.

바람재는 그 이름 값을 하려는 듯 바람이 세차다. 경포대로 가는 길이 여기에서도 갈린다. 월출산 제일의 계곡미를 자랑하는 금릉경포대계곡에는 동백나무가 많아 얼마 후면 흐드러지게 필 빨간 동백꽃들로 하여금 처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것이다.

바람재에서 10분쯤 가다가 구정봉이 있는 오른쪽 길로 향한다. 여기에서 5분도 채 못가니 입을 딱 벌린 모양을 하고 있는 베틀굴이 기다리고 있다. 베틀굴이라는 이름은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하여 여기에서 숨어지내던 근처에 사는 여인들이 베를 짰다는 전설로부터 비롯되었다. 10m 정도의 굴 속으로 들어가 보니 패어진 바위가 흡사 여자의 음부 모양이다. 그래서 이 굴을 음굴 또는 음혈이라 부르기도 한다.

베틀굴 바로 위에는 구정봉이 있다. 높이로는 근처의 향로봉에 조금 못미치지만 천황봉에 이어 월출산의 제2봉으로 부르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서쪽으로 비스듬히 돌아 또 하나의 통천문을 통과하니 구정봉 정상이다. 마치 가마솥과 같은 느낌을 주는 크고 작은 웅덩이에는 물이 고여 있다. 이러한 웅덩이가 아홉 개 있다해서 구정봉(九井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구정봉에 어린 전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교훈을 준다. 옛날 월출산 자락에 자리잡은 구림 마을에 살던 동차진이라는 사람이 이곳에서 하늘을 향하여 오만과 만용을 부리다가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아홉 번의 벼락을 맞아 죽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구정봉에서 보는 주위 풍경은 가히 환상적이다. 천황봉 쪽의 모습도 구정봉에서 볼 때 가장 아릅답다는 것이 실감난다.

구정봉에서 마애불을 향해 북서쪽 능선을 타고 내려간다. 마애불로 가는 길목 좌우의 바위들은 월출산에서는 가장 뛰어난 조형성을 갖추고 있다. 어떤 것은 통채로 한 덩어리의 바위가 하나의 봉우리를 이루다가도 층층이 절리를 이루어 마치 탑을 쌓아놓은 것 같은 모양을 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새가 부리를 처들고 있는 모양을 비롯하여 갖가지 형상으로 천태만상을 이루고 있다. 산 전체가 거대한 수석전시장이요 조물주가 빚어놓은 조각공원이다. 능선에서 기다리고 있는 소나무들의 모양도 가지가지. 하나하나가 커다란 분재에 다름아니다.

20분 정도 능선을 타고 내려가니 웅장한 모습을 띤 마애여래좌상(국보 144호)이 조용히 자리잡고 있다. 높이가 8m나 되는 이 마애불은 세밀하면서도 박진감 넘치게 조각된 걸작으로 평가된다.

마애불은 멀리 영암들판과 영산강의 출렁이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천 년 가까운 세월을 불국정토(佛國淨土)가 되도록 염원해 왔을 것이다. 입석에 가까운 높다란 자연석 위에 세워진 삼층석탑이 100여미터 앞 능선에 홀로 서 있는 모습도 보인다. 이 근처에는 용암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니 마애불과 삼층석탑은 모두 용암사에서 모신 불상이고 불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상과 불탑이 여기에 서 있는 마애불이나 삼층석탑이 전부랴? 월출산 이 능선 저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는 바위 하나하나가 불타의 얼굴인 것을. 그래서 월출산은 일찍이 천불산(千佛山)으로도 불리었다.

천황봉에서 구정봉으로 오는 주능선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으나 이곳에는 사람 발자국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마애불 앞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아 본다. 귓가에서는 바람에 산죽 잎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사각사각 소리에도 불심(佛心)이 서려있음이다.

다시 구정봉으로 올라와 향로봉 산허리를 돌아 미왕재로 향한다. 산세가 점차 순해진다. 갈수록 바위 산의 이미지를 벗고 육산의 면모를 내보인다. 봉우리 몇 개의 산허리를 돌아내려 미왕재에 도착한다. 가을이면 억새로 월출산의 또 다른 묘미를 보여주는 곳이다. 줄기만 남은 억새가 외롭게 바람에 나부낀다.

남쪽 능선 길로 계속 직진하면 무위사에 이른다. 요즘같이 번잡하고 요란한 것을 좋아하는 세상에서 '담담하고 소박한 것의 아름다움을 어느 곳보다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절로 무위사 만한 곳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방향을 서쪽으로 꺾어 도갑사로 내려선다. 언제 거친 바위가 있었느냐 싶을 정도로 여러 종류의 활엽수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홍계골을 지나자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도 시원하다. 얼음을 깨뜨리고 나온 물줄기는 봄의 기운을 몰고온 전령이다. 겨우내 얼어 붙었던 나무 뿌리들도 기지개를 펴 열심히 생명수를 줄기로, 가지로 옮기고 있다. 이렇게 봄을 맞이하는 나무들의 모습 속에서 생명력이 넘쳐 흐른다.

그윽한 분위기가 계속된다. 부도밭을 지나 도갑사에 도착한다. 풍수도참설의 시조로 알려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도갑사도 비교적 사람들의 때가 덜 뭍은 절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오늘의 도갑사는 상당히 어수선하다. 유적발굴을 한다고 대웅전 앞과 뒤를 파헤쳐 놓았을 뿐만 아니라 대웅전 옆에는 중창 불사가 한창 진행 중에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해탈문을 들어서면 오롯한 숲길이 이어지고 그 뒤로 살며시 내다보이는 대웅전의 모습이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었다. 오늘은 그런 오롯함이 없어 서운하다.

잦은 화재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긴 수명을 유지해 온 아담하고 소박한 도갑사 해탈문, 그 해탈문을 나서는데 금강역사가 부릅뜬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해탈문 옆에 서 있는 동백꽃 한 송이가 살며시 꽃망울을 터뜨린다.

(1998. 2. 15)

*산행코스

-.제1코스 : 천황사 주차장(20분) → 천황사(30분) → 구름다리(1시간 30분) → 천황봉(1시간) → 구정봉(20분) → 마애불(30분) → 구정봉(40분) → 미왕재(1시간) → 도갑사 (총소요시간 : 5시간 50분)

-.제2코스 : 금릉경포대(1시간 40분) → 바람재(1시간) → 천황봉

-.제3코스 : 무위사(1시간 30분) → 미왕재(50분) → 구정봉(1시간 10분) → 천황봉

출처 :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
글쓴이 : 작은악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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