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덕산 백련사와 대웅전

2006. 8. 20. 08:27내고향강진의 향기

만덕산 백련사와 대웅전 2005.06.27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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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산 백련사와 대웅전 / the temple of Baekryeonsa

                                   백련사 대웅보전

 

 백련사는 강진읍에서 9km, 다산초당에서 1km 지점의 만덕산 한쪽 기슭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도암면 만덕리 신평마을 246번지, 원래 이름은 만덕산백련사(萬德山白蓮寺)이고 조선 후기에 만덕사(萬德寺)로 불리다가 다시 지금의 백련사가 되었다.

 서기 839년 통일신라의 국운이 다해갈 무렵 무열왕의 8대손인 무염선사(無染禪師, 801-888)에 의해 만덕사로 창건되었다. 고려 명종 때인 1232년 원묘국사 요세(1163-1245)가 중수하여 백련사(白蓮社)라 하였는데, 절을 싸고 있는 뒷산인 만덕산 깃대봉(408m)이 백련의 모습을 닮았다하여 붙인 이름이다. 조선 세종시 행호 스님이 1436년에 또 중수, 탑비와 부도 만경루를 두었다. 고려시대에는 8국사의 도량(道場)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8대사가 배출되었다. 대웅전 앞 만경루에 오르면 구강포의 잔잔한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고 대섬과 가우도가 품안에 들어온다.「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을 가리켜 ‘남쪽 바다에 임해 있고 골짜기 가득히 송림이 울창하며 동백 또한 곁들여져서 사계절을 통해 한결같은 절경’이라 하였다.

 백련사 대웅전(大雄殿)은 1762년에 지어졌으며 정면 3칸․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겹처마인 다포식(多包式)이다. 지방유형문화재 제136호이다. 대웅전 내부의 목조삼존불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중앙은 석가여래로 좌우에는 협시보살을 배치해야 하나 여래상을 안치한 점이 특이하다. ‘대웅보전’ 편액은 조선조 명필인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글씨이다.

 백련사(白蓮寺)는 천태종의 법맥을 이은 원묘(圓妙)국사 요세 스님이 귀족불교에 대한 반발로 서민 불교운동이 한창이던 1232년 강진의 토호인 최 표, 최 홍 등의 지원을 받아 보현도량(普賢道場)을 개설하고, 1236년(고종 23년) 백련결사문을 발표하여 ‘백련결사(白蓮結社) 운동’을 주창하여 백련사가 널리 알려진 계기가 되었다. 고려후기의 불교신앙 개혁운동은 조계종의 ‘수선사’와 천태종의 ‘백련사’가 대표적인 결사였다. 수선사(修禪社)는 순천 송광사를 중심으로 한 정혜결사였으며, 백련사는 강진 만덕사를 근본도량으로 한 법화결사였다.

 요세(了世)가 제창한 백련결사는 건물이 80칸에 이르렀으며, 1240년에는 보현도량에서 ‘묘법연화경’을 조판하고 그 발문을 최 이(崔怡)가 직접 지었다. 요세 스님은 천성이 순후하여 꾸밈이 없으며 눈으로 삿된 것을 보지 않았고, 말을 함부로 하지도 않았다. 또한 밤에는 등불을 켜지 않았으며, 잠잘 때는 요를 깔지 않았다. 시주물은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오직 옷 세벌과 발우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또한 일상생활에서도 매일 참선을 했으며 경전을 가르치는 여가에「법화경」한 부를 외우고, 준제신주를 1천 번, 나무아미타불을 1만 번 염송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스님은 일생 동안 참회를 행하고 강조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서참회(徐懺悔)'라 불렀다고도 한다.

 백련사는 고려 말 최씨 무인정권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대몽항쟁의 차원에서 지식인과 서민대중의 민심을 규합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20년간 8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할 정도로 번성하다가 고려 왕조의 쇠락으로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져 강진만에 가까운 백련사도 결국은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다. 임진왜란 이후 행호(行乎) 주지스님에 의해 백련사는 중창되어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6권2책으로 된 ‘만덕사지(萬德寺志)’는 1817년을 전후로 다산 정약용의 감수를 받아 혜장법사의 제자(기어자굉)와 다산의 제자(이청) 등이 함께 편찬한 것이다. 이 ‘만덕사지’는 조선 후기 실학의 실증적인 방법의 영향을 받아 편찬되었다. 다산(茶山)이 이렇듯 불교관계에도 관심을 두어 문헌의 편찬 사업을 도왔고 스스로 고증적인 작업을 거쳐 저술까지 남긴 데는, 불교 역시 민족의 문화적 유산의 하나로 인식했던 것 같다. 한편으로 불교의 지적 세계 및 혜장 등 선사들과의 만남을 즐겨하였던 것으로, 사고의 방향이 이성적·개방적이었다. 조선후기에도 백련사는 청허 휴정 등 8대사를 배출하였다.


보물로 지정된 백련사사적비 / the monument of Baekryeonsa


                                백련사 사적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246번지 백련사 경내에 있으며, 2004. 1. 26일 국가지정 보물 제1,396호로 되었다. 높이는 4m 이며 조선 숙종 7년(1681)에 건립되었으며, 탄기(坦寄) 스님이 절의 사적이 오래되어 없어져 버릴 것을 염려하여 조종저(趙綜著)에게 글을 청해 세웠다. 이 백련사사적비(白蓮寺事蹟碑)는 귀부와 탑신, 이수를 갖추었는데 이수는 용이 반결하는 방형의 옥개석이다. 비의 건립 연대는 "숭정기원무진후오십사년신유오월일립"이란 말미의 명문으로 보아 1681년임을 알 수 있다. 비의 크기는 귀부 높이가 110cm이며 비신 높이는 233cm, 비폭은 118cm이다. 귀부는 목을 짧게 조각하고 긴 수염은 늘어뜨려 움츠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등위의 귀갑(龜甲)에는 5∼6잎의 꽃무늬를 조각하였으며 중앙에는 굵게 양각한 넝쿨무늬를 배치하여 사각형의 비좌를 에워싸고 있다.

 다산 정약용이 감수한 「만덕사지」에 이 귀부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만덕사지 4권’에 보면, 이 비문을 요약하여 적으면서 그 끝부분에 ‘옛 비는 유실되어 그 소재를 알 수 없고 귀부만 남았는데 탄기 스님이 다른 돌로 비를 세우면서 옛날 비석의 귀부를 사용하였다.’라고 하였다. 비문에도 ‘학사 최 자(崔滋)가 왕명을 받들어 지은 원묘국사의 비가 있었지만 유실되었다.’고 하였다. 이 두 가지의 기록을 근거로 이 사적지에서 옛 비라 지칭한 비는 곧 비문에서 말하는 원묘국사의 비석이고, 귀부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하고 있다. 비문의 글씨를 쓴 낭선군 이 우는 선조(宣祖)의 증손으로 이 외에도 많은 불교 금석문에서 글씨를 남기고 있다. 이 사적비는 건립 연대가 비록 조선시대이긴 하나 귀부를 안치하고 이수에서 반결하는 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등, 전통기법을 잘 고수하고 있다.


백련사 동백림과 원구형 부도 / the woods of Camellia in Baekryeonsa


                               원구형 부도

 

 천연기념물 제151호인 ‘백련사 동백림’은 도암면 만덕리 소재 백련사 주위 1.3ha에 이르는 산의 경사지에 1,5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자라고 있다. 나무의 높이는 7m쯤 되고 줄기 아래부터 가지가 갈라져 관목상으로 된 것이 많다. 주위로 비자․후박․왕대나무가 곁들여져 자라고 있으며 인근에 차나무 등이 자생하고 있다.

 동백나무는 상록활엽교목으로 잎이 두텁고 표면은 진한 녹색으로 광택이 있으며 겨울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때문에 좋은 경관수로 취급되고 있다. 나무가 단단하고 오래 살며 바닷가 가까운 데에서 자란다. 동백꽃은 초겨울부터 기온에 따라 한두 송이씩 피고 지기를 계속한다. 조선시대엔 동백 혹은 산다화(山茶花)라 하여 뭇 시인과 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동백꽃은 노란 꽃술을 품은 선홍빛의 꽃잎 다섯 장과 윤기 흐르는 푸른 잎이 서로 대조를 이루기 때문에 탐스럽고 요염해 보인다. 다른 꽃처럼 꽃잎이 흩날리거나 시들지 않고 양가집 규수처럼 수줍은 듯 반쯤만 핀 채로 개화를 마치고, 붉은 꽃잎과 노란 꽃술이 함께 붙은 꽃송이가 목이 부러지듯 땅에 뚝 떨어진다. 이는 마치 젊고 예쁘게 치장한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 같으리라. 이 백련사의 동백은 꽃잎을 따 녹차, 밀, 수수, 찹쌀, 보리 등의 가루를 이용하여 전을 부쳐 전차(錢茶)와 함께 간식이나 손님 접대용으로 썼다는 동백화전은 그 역사가 수백 년에 이른다고 한다.

 한 겨울부터 피는 동백꽃에는 꿀이 듬뿍 들어 있다. 꿀을 먹이로 삼는 벌과 나비가 활동하기에는 아직 이른 때문인지, 이 동백꽃의 꿀은 동박새 차지가 된다. 동박새는 벌과 나비가 없는 철에 동백꽃을 찾아다니며 꿀을 먹고, 그 대신에 동백꽃의 가루받이(受粉)를 하고 다닌다. 동박새는 몸길이가 약 10여㎝에 불과한 작은 새이다. 깃털의 색깔이 녹색, 황색, 흰색으로 물들여져 있어서 매우 아름답다. 아주 작고 귀여운 동박새가 꽃가루를 옮겨 열매를 맺게 해줘 한자어로 조매화(鳥媒花)라 한다. 동박새는 원래 거미나 나비를 잡아먹지만, 추운 겨울에는 동백 씨앗이나 꿀을 먹는다. 동백나무가 많은 남해안에서 주로 볼 수 있다. 

 백련사 원구형 부도는 탑신 상단쪽 사방으로 연화문형의 연주문띠와 원구형 탑신, 방형 기단 등 특이한 기법으로 장식되어 있다. 백련사 동백림 숲속에 위치한 이 원구형 부도는 백련사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3호이다.

 

 강진만의 보배로운 만덕산 / mt. Mandeoksan


                  백련사 동백림을 안고 있는 만덕산

 

 아름다운 바위산인 만덕산은 높이 408.6m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암릉이 많고 아기자기한 정취가 넘치는 산이다. 천년고찰 백련사와 동백숲, 다산선생의 실학정신이 깃든 다산초당 등 역사적 자취를 더듬어 볼 만한 곳이 있어 등산과 유적지 답사를 겸한 산행이 적격이다.

 능선과 정상에서 바라다보는 구강포의 잔잔하고도 포근한 자태와 죽도 가우도 등 작은 섬들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강진읍 덕남리에서 도암면 석문리에 걸쳐 있는 산은 7.4km 정도이고 등산로는 강진 옥련사에서 필봉, 깃대봉, 바람재, 암릉을 거쳐 용문사로 이어진다. 필봉과 깃대봉에 오르면 강진읍과 탐진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련사에서 만덕산 정상을 거쳐 다산초당으로 내려오는 코스는 5km 정도이고 2시간 정도 소요된다. 다만 천상의 옥녀가 배를 짜서 강진사람들에게 비단옷을 입혀주니 그 덕이 크다는 만덕산 옥녀봉의 배틀 부위는 모 회시에서 채광한다고 헐어 흉측한 모습을 드러내 놓고 있어 이의 복원이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