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8. 20. 08:24ㆍ내고향강진의 향기
조팽년의 주봉서원(冑峰書院) | 2005.06.04 1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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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조팽년의 주봉서원(冑峰書院) / Ju-bong confution school
옴천면 영산리 568번지, 1624년 도내 사림들이 주봉산 아래 기좌리 좌척에 조팽년(1549-1612)을 제향하기 위하여 ‘주봉서원’이란 이름으로 창건하였다가 1868년(고종 5) 훼철되었다. 1971년 도내 유림들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복설하였다. 계음(溪陰) 조팽년과 조규운(1725-1800)을 모시고 있다. 조팽년(趙彭年)의 호는 계음이고 1549년 옴천면 황곡에서 아버지 세걸과 어머니 김해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한양이며 7세조 때 나주로 내려와 살다가 9세조(고조부) 때 황곡으로 이거하여 뿌리를 내렸다. 조팽년은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으며, 황곡리 선영하에 안장되었다. 1623년(인조 1)에 충효의 공으로 증통정대부 승장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에 추증됐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한석봉에게도 글씨를 가르쳤다. 말년에는 고향 북쪽에 계음정이라는 정각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였다. 계음은 항상 봉급으로 부모봉양을 못한 점과 젊었을 때 남에게 크게 베풀지 못한 것을 후회하였다. 1593년 암행어사가 되어 전라도를 순찰할 때 상소를 하여 이순신을 재 등용케 하였다.
49. 심산유곡의 월곡리 / Wolgok-ri
월곡리는 신월과 구곡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을 앞으로 월곡저수지와 돈밭재가 있다. 이 지역에는 광맥이 있어 과거부터 큰 마을을 형성하였으나 저수지가 생기면서 마을이 일부 잠겨 축소되었다. 월곡 구곡(鳩谷)에는 월곡제라는 저수지가 있는데, 강태공들이 연중 즐겨 찾아 월척의 꿈을 캐고 있다. 한 때는 명당이라 하여 120여 호(戶)까지 살았으나 현재는 10여 호가 살고 있다. 구곡은 여러 골에서 비둘기처럼 화목하게 생활하고 지형이 등불아래 비둘기집 모양이라 하여 구곡이라 했으며 등구실이라고도 했다. 과거에는 가마솥을 생산하여 영암 나주 영산포 등지에 공급하여 왔으나 임진란과 6․25전쟁 시에는 전소되어 폐촌 되다시피 했다. 마을 인근에 가마솥을 만들던 용광로 터가 있으며, 월곡저수지에는 자궁동굴(샅바위) 이라고 부르는 굴이 있다. 이 바위가 마을을 보고 있어 대대손손 자손이 번성한다고 한다. 또 동굴을 올려다보면 여자들이 바람을 피운다고 해 동굴 앞에 나무를 심어 가렸다. 이 동굴에 불을 피우면 영산포에 있는 동굴에서 연기가 나온다는 설이 있다. 또 월곡 신월(新月)에서는 석회석을 채취하여 건축용 석회 가공업과 가마솥을 구워 팔았다고 전해오며 그 흔적을 여기 저기 확인할 수 있다. 마을 뒷등이 해발 660m로 강진군에서는 가장 고지대이다. 이 곳은 지형이 높아 달이 가장 오래 비추어지고 동에서 떠오른 달이 항상 새롭게 보였다 하여 신월이라 하였다. 한편 영암 활성산에서 서편으로 내려오는 산맥이 돈밭재(錢田峙)를 만들었다. 돈밭재는 강도가 득실거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소를 팔아 오다가 도둑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돈을 묻어둔 잿등의 명칭으로, 다음에 와 찾으니 밤에 묻어둔 곳이라 찾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다. 50. 서민들의 애환 어린 기알재 / the Gial-Pass
옴천면 개산리 깃대봉에서 병영면 한학리 한림마을로 가다보면 ‘귀활재’라 부르는 재가 있다. 병영면과 옴천면의 경계지점으로 현재는 포장이 되어있다. 현재는 기알재(해발 120m)라 부르며 이곳에 서 나는 약수는 물맛이 좋고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약수로 외지인들이 많이 찾는다. 조선시대 전라병영성 병사가 올 때 이 곳에서 알현한다 하여 귀알재(歸謁峙), 사또에게 고한다 하여 고알재(告謁峙), 병영에 와 심문을 받고 살아 돌아가면서 병영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면서 ‘귀한 목숨이 이 재를 넘으면 살아간다.’는 뜻으로 귀활재(歸活峙)라고도 하며, 풍수설에서는 고양이가 알을 품은 듯 쥐를 보고 쪼그리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괴알재(猫卵峙)라고도 한다. 또한 병영성의 총책임자인 병사또가 병영성을 나와 인근지방 순찰이라도 가게 되면 그 행렬은 10리에 달했고 병졸들의 창검은 하늘을 찌를 듯 했으며, 이를 엎드려 바라보는 백성들의 그 위용에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더구나 당시 병사또에게는 엄청난 권한과 지금 같으면 즉결 처분까지 주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죄가 있건 없건 병영성으로 끌려온 백성들은 두려움으로 온몸이 움츠러들고 마는 것이었고, 죄가 있건 없건 병영성의 근처에만 가더라도 사색이 될 지경이었다. 어떤 죄를 지었든지, 혹은 조사결과 무죄가 되었건 곤장을 맞던 간에 방면되어 살아 돌아가게만 된다면 그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그래서 바로 이 귀할재에 이르러서야 "이젠 살았구나" 하고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뿜었다는 것이며, 이 고개를 살아서 돌아간다는 뜻으로 ‘귀활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 고개에는 이와 다른 전설 또한 전하고 있다. 즉 영암등지의 장터에서 물건을 사고팔고 돌아오는 상인들은 옴천 입구 ‘돈밭재’를 지나게 되는데 그 곳에서 어김없이 도적을 만나 돈을 털리기 일쑤였다. 그 곳에서 탈을 만난 상인들은 이 곳 귀활재에서 도적을 만날 경우 ‘개가 알을 날 일이다’고 한탄하면서 아무 것도 없는 주머니를 내어 보였다고 하며 이런 일화로 사람들은 이곳을 가리켜 ‘개알재’라고도 하였다.
51. 황곡마을 효사문과 영예비 / Hwanggok-ri
주봉서원 조팽년의 고향인 황곡마을, 정각이 자리한 ‘효사문’은 낭주 최씨 녹사공파 20대 상준(尙峻)의 유허비가 있다. 이는 7대 독자로 내려온 최씨가 자손이 한이 되어 자식을 얻고자 황곡에서 영복까지(4.2km)의 산길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시모(侍暮) 3년을 사는 중, 어느 날 현몽에 ‘자식을 원하면 돈밭재를 넘고 부자 되기를 원하면 뱁새재를 넘어 청풍에 이장하라’는 꿈을 꾸었다. 이에 그는 자식을 얻기 위해 돈밭재를 넘어 이웃 영암 청풍리에 이장하여 4형제를 얻으니, 그 후손들이 이 비를 건립하고 제사를 지낸다. 1989년 건립된 제각 이름은 진덕재(進德齋)이다. 또 전에 물방앗간과 정자 3개가 있었다는 삼정자(아래 사장)에는 두꺼비 같이 생긴 작은 바위가 있다. 풍수지리설로 두꺼비가 뱀을 쫒는 형국이라 한다. 또 향약진흥과 옴천면 관선회 창설자인 지곡거사 최윤채, 죽헌거사 최정채의 두 분 영예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영예비’가 황곡마을에 있었으나 현재는 옴천면복지회관 앞에 있다.
52. 옴천사와 옴천팔경 / the temple of Omcheonsa
옴천면 개산리 391번지 목암재골에 위치하고, 1993.10월 원각종 호남 종무원 사찰이 되어 운영되고 있다. 1967년 안순희 스님이 정동리 산정에 만년암을 건립하고 1983년 입적하자 1990년 마점암 스님이 현 위치로 옮겨와 옴천사로 개칭하고 사세를 확장하였다. 다음은 운곡 조면형(趙冕衡)의 ‘차율정 팔경운(次栗亭 八景韻)’의 내용이다. 가. 죽림야우 : 대나무 숲의 밤비 나. 오천추월 : 오동나무 냇의 가을 달 다. 인산모종 : 수인산의 밤 종소리 라. 월악잔조 : 월출산의 지는 해 마. 용지유어 : 용못의 고기 떼 바. 봉강귀안 : 봉황산에 날아가는 기러기 떼 사. 연천어화 : 제비내의 고기잡이 불 아. 마동초적 : 마동의 푸나무군 피리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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