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변란시 울었다는 비자나무

2006. 8. 20. 08:21내고향강진의 향기

큰 변란시 울었다는 비자나무 / 42. 용두서당 2005.05.19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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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큰 변란시 울었다는 비자나무 / Torreya nucifera tree

 천연기념물 제39호로 1962. 12. 3일 지정되었다. 소재지는 강진군 병영면 삼인리 376번지이다. 이 비자나무는 수령(樹齡)이 약 500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10m 가슴높이 둘레가 5.2m(1962년)이다. 가지의 길이는 동·서가 15m이며 남·북이 14m이다. 북향 경사지에 있으며 주위에는 대나무 숲이 있고 앞에서 볼 때에는 지상 1.9m에서 커다란 가지가 길게 뻗었으며, 뒤쪽에 가지는 짧고 양쪽 가지는 비슷하게 자랐다.

 

 이 나무가 500여 년 동안이나 벌채를 피해 자랄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태종 17년(1417)에 이 지방에서 군사용 건물을 짓기 위해 주변의 쓸만한 나무는 모조리 베었으나, 당시 이 나무는 키가 작고 휘어서 건축용 목재로 부적당하였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살아남게 되었으리라는 견해이다. 둘째는 당시 이 나무의 열매는 기생충을 구제하는데 유일한 약이었기 때문에 이 곳 사람들의 보호를 받아왔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조선 5백 년 동안 호남지방의 사령부로 내려오던 병영성이 동학군에 함락되어 폐영될 때까지 많은 군사적 사건들이 있었겠으나 열매를 약용으로 하였기 때문에 잘 보호되어 온 것 같이 보인다.

 관련된 전설로는, 이 나무가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소리 내 우는 ‘영험한 나무’라고 한다.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이 나무가 운 것은 동학농민혁명, 해방, 6·25전쟁 등 딱 세 번이다. 동학농민혁명 때는 이 나무가 울면서 마을 어귀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인근에는 원래 비자나무숲이 우거졌으나 1417년(태종 17년) 전라도병마도절제사영을 강진군 병영면으로 옮겨오면서 숲은 사라졌다. 나뭇결이 곧고 단단해 건축·가구·선박 등에 사용되는 비자나무로 관아를 짓고 외성을 쌓았기 때문이다. 이 비자나무는 우리나라의 내장산 이남과 일본에서 자란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여겨 매년 음력 1월 15일에 나무 주위를 돌면서 마을의 평안을 빌었으며, 한여름에는 더위를 식혀 주는 피서지가 되기도 한다.


42. 용두서당의 해암과 연파 / Yong-du private school

 

 조선 중기 김응정 ‘해암가곡’의 산실인 서당으로, 구한말 연파 김병휘 선생이 인근 3개 면의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다. 용두마을 뒤편 작은 산봉우리에 위치한 서당은 금강천을 사이로 활쏘기 터가 있었다고 한다.

 해암 김응정은 지금으로부터 450여 년 전 중종 27년(1527) 12월 26일 병영 삭둔리에서 태어나 1620년(광해군 12) 별세한 우리나라 시조문학의 큰 별이다. 어머님께서 별세하시자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한 효성이 지극한 분이었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는 전 가산을 팔고 손수 소금을 구어 마련한 돈으로 군량미 오백 석을 만들어 의병장 고경명과 조  헌을 크게 도왔다. 학문이 높아 그가 지은 시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한 문장가로, 강진 군민회관 뜰에 그가 지은 시가비가 세워져 있다. 당시 전라감사 정 철(鄭澈)과 최 관(崔瓘)이 조정에 벼슬을 추천하기도 하였으나 고향에서 오직 제자들을 지도하며 일생을 마쳤다. 그가 지었다는 수백편의 가곡(歌曲)인 시조(時調) 중 현재는 명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지었다는 ‘서산일락가(西山日落歌)’를 비롯하여 8수만이 전하는데, 모두가 주옥같은 작품이다.


  삼동(三冬)애 뵈옷닙고    추운겨울에 베옷입고

  암내(巖內)의 눈비마자     바위속 눈비맞으면서

  굴움센 벗뉘랄           흐린날씨로 햇볕

  쬔젹은 업건마         본적 없지마는

  서산(西山)에 해지다하니   서산에 해진다하니

  그를 셜워노라         그를 설워하노라


 그 후 조선말기 연파 김병휘(金柄煇, 1842-1903) 선생은 이 곳에서 나라의 위태로움을 슬퍼하며 오직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다. 지금도 후학과 문중에서 매년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다음은 연파 선생의 ‘권학가(勸學歌)’인 시(詩) 한 수를 소개한다.


빈자사지상(貧者士之常)   가난은 항상 선비의 모습이려니

하환단표공(何患簞瓢空)   어찌 도시락이 비었다고 근심하랴

물이빈지고(勿以貧之故)   가난을 이유로 핑계 삼아

중도기전공(中途棄前功)   중도에 공부를 포기치 말지니


쌍친년상부(雙親年尙富)   부모님 연세 아직 넉넉하시니

정이무학시(正爾務學時)   정히 배움에 힘쓸 때이다

재질원불노(才質元不魯)   재질도 원래 둔하지 않으니

가이위칙위(可以爲則爲)   가히 모범이 될 수 있으리


             (증최여중방현, 贈崔汝重芳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