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8. 20. 08:20ㆍ내고향강진의 향기
머슴 유총각이 이룬 병영 홍교 | 2005.04.28 12: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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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The bridge of Honggyo in Byeongyoung
그 조각의 정교하고 우아함이 다른 어떤 홍교에 비해도 손색이 없는 다리로 평가받고 있는 ‘홍교’는 지방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4.5m, 넓이 3.08m, 길이 6.75m의 조선시대 석교이다. 병영면 성동리 323-3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다리 아래로 성동천이 흐른다. 홍교(虹橋)는 병영의 관문으로 일명 배진강다리라고도 하는데, 병영성 당시 이 홍교를 이용하여 병영을 출입하는 주된 통로였다. 직사각형 화강석재 74개를 26열로 정교하게 무지개처럼 쌓고 잡석을 채워 보강한 다음 점토로 다리 위를 다졌다. 조선 숙종때 유한계(劉漢啓) 정승의 금의환향을 기념하기 위하여 양한조(梁漢祖)가 감독, 준공하였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18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에는 벅수 한 쌍이 서 있었으나 분실되어 지금은 재현품이 세워져 있다. 이 다리는 특이한 축조 방식과 다리 아래 가운데 아름답고 사실감 있는 여의주를 머금은 용머리의 조각이 찾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한다.
이 홍교에 얽힌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3백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병영면 상림리에는 오래도록 이 지역에 토착하여 세력을 떨치던 김씨일문이 있었다. 양반 가문으로서 세도가 당당할 뿐 아니라 부농인 지주로서 유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노복만도 수십 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중 유 총각은 원래 양반집의 후손 이었으나 가세가 몰락하여 비록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고는 있을지언정 이목이 준수하고 재기가 넘쳐 영특하였다. 주인 내외의 신임도 두터웠으므로 안채의 출입이나 특별한 심부름은 유 총각이 도맡아서 하곤 했다. 이러한 것을 주인집 딸인 김 낭자가 모를 리 없었다. 김 낭자의 유 총각에 대한 호기심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김 낭자는 바구니를 옆에 끼고 산나물을 캐러 산에 올라갔다. 그날따라 유 총각은 집안에 별로 할 일도 없고 해서 지게를 지고 산으로 나무를 하러 올라갔다. 그런데 지금까지 구름한점 없이 맑고 깨끗하던 하늘이 순식간에 먹구름으로 뒤덮이더니 번개와 함께 억수같은 소낙비가 내렸다. 김 낭자가 이 같은 억수 같은 비를 피할 곳이라고는 큰 소나무 아래 밖에 없었다. 때마침 유 총각도 나무를 하다가 이 비를 피한 곳이 바로 김 낭자가 피한 큰 소나무였다. 비에 흠뻑 젖은 김 낭자는 반가운 생각보다는 부끄러운 생각에 피해서 도망치려 했으나, 김 낭자를 발견한 유 총각은 자신도 모르게 김 낭자를 붙들었다. 짓궂은 날씨는 더욱 변덕을 부리듯 번개와 함께 천둥소리는 두 사람을 더욱 떨어질 수 없게 만들었다. 두 남녀는 아무도 없는 산중에서 서로가 사랑을 고백하며 먼 장래를 굳게 약속했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열 달이 지나 김 낭자는 옥동자를 낳았다. 어린아이는 비범한 아이로 자라 열 살 이전에 사서삼경에 통달하여 신동이라 불렀다. 외가에서도 아이가 비범하고 영특하므로 귀여움을 받고 자라났다. 학문에도 정진하여 과거에 훌륭한 성적으로 급제하여 위로는 상감의 총애를 받기에 이르렀고, 점차 요직에 승진되어 정승이 되었다. 이가 곧 유한계 정승이다. 양반집 머슴이던 유 총각과 주인집 규수인 김 낭자 사이에서 태어나기는 하였으나, 이는 하늘이 낸 훌륭한 인재로 정승이 되었으므로 병영에서는 유정승의 금의환향을 기념하기 위해 돌아오는 길목 배진강(성동천)에 이와 같은 홍교를 가설하게 된 것이라 전한다. 그런데 이 전설속의 인물은 실존 유한계 정승 이야기로 장흥출신의 유명한 학자 유호인(1502-1584)의 후손이며, 아버지 유호인이 강진 병영의 상림리 영광 김씨 김진성의 딸과 혼인하면서 처가인 강진 상림리로 이거하였던 것으로 밝혀진다. 아마도 유 총각과 김 낭자 이야기는 바로 유호인과 김진성 딸 사이의 사랑이야기가 윤색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아들이 바로 유한계(1688-1794)였는데 총명하기도 하였지만, 107세의 장수를 누렸다. 관직으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종2품)가 되었고 1790년에 ‘숭록대부’(종1품)가 되었다. 전설적인 이야기의 주인공 유정승의 묘소가 현재 한학리 학사마을 옆산인 박실재에 있다. 한편 홍교와 관련하여서는 유정승이 제주양씨 양한조와 협력하여 만들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배진강의 수로를 유정승이 뚫어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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