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의 7년간 체류지

2006. 8. 20. 08:17내고향강진의 향기

하멜의 7년간 체류지 2005.04.14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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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lace Hamel had been staying

 

 병영은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이 1656년 3월부터 1663년 2월까지 약 7년간 억류생활을 했던 곳이다. 이는 전체 억류일인 1653. 8. 16일부터 1666. 9. 14일 일본으로 탈출하기까지 13년의 기간 중 약 절반을 차지하는 기간이다. 그동안 하멜일행은 제주․서울․강진․남원․순천․여수를 전전하면서 겪은 한국에서의 생활을 ‘하멜표류기’로 남겼다.

 하멜(Hamel Hendrik)은 1630년 네덜란드의 호르큼에서 태어나 조선에 15년간 억류되었으며 귀국 후 또 한번 동방으로 항해를 하였고, 연합동인도회사의 회계사로 살다가 1692년 독신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동인도 지역에서 활발한 무역활동을 하다가 일본으로 항해하는 도중 제주도에 표류한 64명중 28명은 사망하였고 36명만이 생존하였다. 또 억류 기간 중 21명이 더 죽고 15명만이 살아남았다. 제주에서 10개월간의 조사를 받은 후 서울로 압송되어 훈련도감에 배치되어 호패를 받았다. 하멜 일행 중 2명이 청나라에서 온 사신에게 선처를 호소한 사건이 발생하자 재발방지를 위해 1656년 3월 강진의 병영으로 유배시켰다.

 


                        하멜이 쌓았을 거라 추정되는 한골목 / the Han Side Street

 

 하멜일행을 훈련도감에 배치한 주된 원인은 북벌을 위한 군비강화가 당시의 과제였던 만큼 병기개발이라는 목적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에서의 탈출실패, 서울에 온 청나라 특사에의 탈출실패 등을 계기로 조정에서는 이들을 처형하자는 논의도 있었으나 인도적인 견지에서 전라도 병영으로 유배된다. ‘하멜표류기’는 강진에서 7년간의 장기적인 유배에 대해 기록은 빈약하다. 하멜 일행은 병영에 도착하여 ‘스페르웨르호’의 무역품인 사슴가죽을 되돌려 받아 겨울옷을 짓고 일부는 팔아 필수품을 장만하기도 했다.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부역에 동원되었는데 주로 한달에 두 번 병영성의 광장과 장터의 풀을 뽑고 청소를 하는 것이었다.

 하멜 일행 33명(3명은 사망)은 이 곳에서 생활하면서 몇몇은 결혼해 살기도 했으며, 생계를 위해 잡역을 하거나 나막신을 만들어 팔았고 춤판을 벌여 삯을 받기도 했다. 우리나라 나막신이 일본의 나막신과 달리 네덜란드와 같이 통으로 만들어진 것을 볼 때 이들이 나막신을 전래한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하며, 또 이 지역 일부에 남아있는 담장 중에 빗살모양으로 쌓인 담장이 있어 하멜일행이 잡역을 하면서 쌓았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멜이 쌓았다는 2m 높이의 돌담과 수로, 앉아서 고향을 생각했다는 은행나무 등 아직도 하멜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하멜 일행이 신었다는  나막신과 짚신 

 

하멜일행은 이 곳 은행나무 밑에서 수인산성을 바라보며 고향을 생각하기도 했다. 1660년 신임절도사는 하멜 일행을 불쌍히 여겨 자유를 주었는데, 이 때 집과 가구, 텃밭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하멜이 병영에 도착한 것은 효종 7년(1656)으로 부임해오는 절도사의 태도에 따라 이들의 처우가 매우 달랐다. 처음에는 후한 대접을 받아 편하게 생활하였으나, 나중에는 주식인 쌀 이외에는 땔감 지급이나 월동 옷가지 등이 지급되지 않아 스스로 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관에서 지급받은 식량과 스스로 마련한 필수품 이외에는 구걸을 통해 해결하였고, 나무를 해서 땔감을 내다 팔았다. 또 나막신을 만들어 판매해 베를 구입해서 솜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다. 체류 후반기에는 관아주변 잡일의 대가로 약 보름간의 휴가를 얻어 필요한 물품을 마련하였다.

 


                       하멜 체류지 인근의 병영교회

 

 하멜 일행은 평소 승려들과 가깝게 지내었다. 스님들에게 이국적인 네덜란드와 외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밥을 얻어먹었다. 효종 이후 현종 연간의 대기근을 통해 수천 명의 백성이 굶주림으로 사망하였다. 일반 백성들은 곡식을 구하지 못해 도토리나 소나무 껍질과 같은 구황 음식으로 목숨을 연명했다. 현종 4년(1663)까지 기근은 계속 이어져, 하멜 일행에게도 지급할 쌀이 없게 되자 이들을 타 지역으로 분산시키게 된다.

 하멜은 7년간의 병영 생활을 통해 다소나마 안정을 되찾고 집과 가구 전답도 마련하였으나, 유배 기간 중 3년째 계속되는 기근으로 남원, 순천, 여수로 분산되었는데 병영생활에서 11명이 사망하고 생존자는 22명이었다.

 1663년 병영생활을 마치고 좌수영 12명, 순천 5명, 남원 등지로 5명이 분리 이송되었으며, 마지막 체류지인 여수에서 일행 중 8명이 1666년 9월 탈출후 ‘하멜표류기’를 저술하여 이 곳에서의 생활을 최초로 서양에 알렸다.

 


                    하멜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