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8. 20. 08:16ㆍ내고향강진의 향기
천연요새 수인산성 | 2005.04.14 09:53 |
http://paper.cyworld.nate.com/e-BeautifulGangjin/569005 | |
The Fortress of mt. Suinsan
병영면 지로리에 속하는 해발 561m의 수인산의 ‘수인산성’은 천연 요새로 고려 때부터 왜구의 침입시 보성, 장흥, 강진, 영암 주민들의 피난 및 저항지였다. 동국여지승람(1481년) 기록에 의하면 ‘둘레 3,756척 높이 9척, 많은 부속 건물과 동서남북문과 초소, 우물이 6개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 정상에는 노적봉 봉수대가 있어 ‘동으로 장흥 억불산, 서로는 영암 갈두산, 남으로 마량 봉대산’과 통하였다. 별장이 주둔한 곳으로, 원래 수인사 절터가 있던 곳이다.
유적으로는 방죽터․맷돌(돌확)․비밀통로라고 전해오는 수로․서문쪽 암벽의 명문 등 여기 저기 찾아볼 수 있다. 산 정상의 억새밭과 탁 트인 바닷가, 왕대 등 상록수림이 무늬를 놓은 수인산은 병영의 진산으로 전라도를 지키는 망루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수인산성의 축조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부터 존속했던 산성으로, 조선 태종 10년( 1410) 3월에 축성된 전라도 남해안 지역의 대표적인 산성이다. 고려는 13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왜구의 침입이 잦아짐에 따라 연해지역에 축성을 하게 된다. 특히 우왕 때에 이르러서는 왜구가 점차 내륙 깊숙이 침입하자 주민들을 산성에 피신시킬 필요가 생겼고, 이에 따라 1377년(우왕 3)에 이르러서는 각도의 요충지에 방호를 두어 유민을 막고 산성도 쌓게 하였다. 이 후 잠시 주춤했던 왜구들은 조선 태종대에 적극적인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연해에 극심하게 출몰하였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1408년(태종 8) 1월과 1414년(태종 14) 8월 두 차례에 걸쳐 해도찰방(海島察訪)을 파견하는 한편 산성과 읍성에 대한 축성론이 대두하게 되었다. 1410년(태종 10) 무렵에는 전라·충청·경상도 등 하삼도 연해지역에 축성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고, 수인산성의 경우도 이 때 전라도내 5개 산성과 함께 수축을 보게 된다. 이들 산성이 쌓여진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모든 산성이 둘레 1천보가 넘는 대형 성이라는 점, 둘째 성이 위치한 산의 규모가 커서 거대했다는 점, 셋째 수량(水量)이 넉넉해야 한다는 점, 넷째 많은 수의 주민들이 한꺼번에 피신할 수 있도록 군창을 갖추었고 또한 몇 개의 고을 주민들이 한 곳에 피신할 수 있어야 된다는 점 등이다. 수인산성에 얽힌 설화로는 ‘성을 빨리 쌓기 위하여 내기를 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때는 누에씨에서 누에가 나오는 초여름으로 베 잘 짜는 여인 한사람을 골라 누에를 길러서 베 한필을 혼자 힘으로 짜내도록 하고, 동원된 백성들은 산성 쌓기를 하되 어느 쪽이 먼저 끝내는가의 시합이었다. 성 쌓기에 동원된 백성들은 열심히 성을 쌓기 시작했고, 베 짜는 여인은 누에나방에서 애기누에를 털어 뽕잎을 먹여 한잠․두잠․석잠․넉잠을 재워 누에가 익어 누에 몸이 투명하게 되자 섶에 올리고 고치 짓기를 마치자 고치를 따서 실을 쓰고 베매기를 하여 베틀에 올리고 불철주야 베를 짜서 생초(生綃) 한 필을 자로 재어 끊으니 다수가 동원된 성 쌓기는 며칠 전에 이미 축성을 끝낸 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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