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8. 20. 08:13ㆍ내고향강진의 향기
김억추 장군과 금강사 | 2005.04.06 14:55 |
http://paper.cyworld.nate.com/e-BeautifulGangjin/552468 | |
The Temple of Geumgangsa for general Kim, Eok-chu
강진읍 영파리 13번지에 위치한 금강사는 조선 정조 24년 도내 유림들의 발의로 충무공 이순신과 현무공 김억추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창건된 사우이다. 지방기념물 제91호이다. 현무공(顯武公) 김억추(金億秋, 1548∼1618) 장군은 작천면 박산마을 출신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의 명장이다. 1577년 29세에 처음 알성과(謁聖科)에 응시하여 무게가 96근이나 되는 활을 당겨 과녁을 모두 명중시키자 선조가 병조참판이던 율곡 이 이를 시켜 이를 기념하는 표지석을 훈련원에 세워 '김억추석'이라 부르게 하였다. 김억추가 순창군수로 있던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가 피난을 떠나며 그를 찾으니 밤낮으로 말을 타고 달려 평양에 당도한 뒤 평안도 방어사를 맡아 공을 세웠으며, 또 안주목사를 맡아 맹렬히 싸웠으나 그만 패하여 관직을 빼앗기고 백의종군하였다. 병영 출신 해암 김응정은 김억추가 아무런 잘못도 없이 죄인으로 잡혀가자 ‘김억추가 비록 감옥에 있지만 그의 잘못이 아닌 것을 남들이 잘 안다. 고기 잡는 그물에 기러기가 걸린 꼴이나 그냥 내버려두라. 멀리 있는 임금은 그를 믿을 것이다’라는 시를 지어 사기를 북돋웠다. 그는 백의종군하면서 크게 공을 세워 대동강을 지키는 주사대장에 임명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김억추가 아니면 이순신을 도울 자가 없다’고 하여 전라우수사에 임명된 그는 이순신을 도와 어란포 싸움과 명량해전에 참가했다. 지금의 진도대교가 있는 명량(울돌목)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우수영에 소속된 장수인 권 준, 임준영, 송희립, 배길문 등에게 이르기를 “이 곳 명량은 한신이 위표를 사로잡던 목앵(나무술병)과 같은 지역으로 왜적들은 나의 뜻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니, 명량에서 이기려면 거북선의 힘이 절반이나 차지한다. 지역은 강물이 내리 쏟아지는 곳이라 매우 험난하며 눈알이 뒤집히니, 강물의 속사정은 나와 베개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라 하였다. 밤낮으로 전함을 만들고 물속에는 쇠줄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쇠줄이 너무나 무거워서 움직이기 어려웠으나 김억추는 조수간만의 차이에 따라 높낮이를 알맞게 조절하였다. 9월 15일경 날이 밝기 시작할 때인 새벽녘에 왜적의 배 130여척이 쳐들어 왔다. 이 때 장수들에게 당부하기를 “국가에서 사람을 기르는 것은 오늘 같은 때에 쓰기 위함인데 싸우다가 죽지 않으면 어느 때를 기다릴 수가 있겠는가.”라고 한 뒤에 활을 들고 뱃머리에 올라서서 활을 쏘니 왜적의 장수인 마다시가 물속으로 꼬꾸라지면서 적들의 사기를 꺾었다. 이 날 싸움에서 양쪽의 열 손가락 모두가 칼로 베인 것처럼 갈기갈기 찢기도록 활을 쏘아 31척을 침몰시키는 승리로 이끄니 ‘영남을 보전하려면 호남이 완전해야 하고 호남을 잘 지키는 것은 김억추의 꾀에 달려 있다.’라고 이순신은 나라에 보고하였다. 한마디로 명량해전은 김억추의 지략과 용맹에 따른 승리였다. 그 공으로 그는 정이품에 올랐으나 너무 높은 직책을 맡긴다고 헐뜯는 무리들이 많아 59세(1606년)에 벼슬을 그만 두고 낙향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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