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8. 20. 08:26ㆍ내고향강진의 향기
실학의 집대성지인 다산초당(茶山草堂) | 2005.06.10 1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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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茶山草堂) / the house of Da-san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 유배생활 중 저술활동과 제자들을 가르친 초당으로, 도암면 만덕리 귤동마을 339-1번지에 있으며 사적 107호로 지정되었다. 다산초당은 전후와 좌우에 마루를 둔 정면 3칸․측면 1칸의 기와집이다. 동암과 서암은 정면 3칸․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건물이고, 천일각은 남측으로 기둥을 2중으로 세운 아담한 누각이다. 만덕산 기슭의 만덕리, 귤이 많이 난다는 귤동마을 뒷산인 대나무와 소나무 등 상록수림에 둘러싸인 다산(茶山)의 오솔길을 오르자면 아름드리 소나무 등으로 둘러싸인 숲속에 작고 산뜻한 기와집이 산중턱에 있다. 이 다산초당은 조선후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사상과 정신이 깃든 곳이다. 동암(東庵), 서암(西庵), 천일각(天一閣), 다산사경(茶山四景) 등의 유적이 있다. 초당은 원래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외가인 귤동마을 입향조 윤취서(尹就緖, 1688∼1723)에 의해 건립된 해남윤씨의 산정(山亭)으로 전해지며,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온 이후 1808년부터 1818년까지 10여 년간 이 곳에 거처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이 초당의 이름은 선생이 거처하면서 만덕산 기슭의 작은 산 이름인 ‘다산’을 따와 다산정(茶山亭)이라 하였다. 현재의 초당은 마루가 넓고 길며 방도 큼직하여 유배 당시 다산이 살던 초가(草家)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선생의 회갑 년에 지은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자선묘지명(自選墓地銘)’에 의하면 초당의 모습은 이러했다. 「무진년(1808) 봄 다산으로 이사하였는데 이 곳에다 대(臺)를 쌓고 연못을 만들었다. 줄을 맞춰 꽃과 나무를 심고 물을 끌어다 비류폭포를 만들었다. 동암과 서암 두 초막을 짓고 1천여 권의 장서를 두고 저술을 하면서 스스로 재미를 느끼고 살았다.」 본래의 초당은 1930년대에 허물어졌으며, 현재의 건물은 1957년 강진의 ‘다산유적보존회’가 옛 건물터에 초당을 기와집으로 복원한 것이다. 초당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 중에서 뽑아 그것을 본떠 새긴 ‘다산초당(茶山草堂)’이라는 현판이 마루위에 걸려있다. 초당의 연못 옆으로 조그만 기와집이 하나 있는데 바로 ‘동암’이다. 소나무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는 곳이라 하여 ‘송풍암(松風庵)’이라고도 불렀던 동암은 선생이 거처하며 방대한 저술을 하였던 곳으로, 다산의 친필을 집자하여 모각한 ‘다산동암(茶山東菴)’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동암에는 추사 김정희의 흔적이 하나 더 있는데 ‘보정산방(寶丁山房)’이라는 현판글씨가 그것이다. 다산보다 24세 연하로서 학문적으로 다산을 흠모하였던 추사가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이라는 글씨를 썼는데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다. 1976년 ‘다산유적복원위원회’가 중건하면서 기와집으로 복원하였다. ‘서암’은 초당의 서쪽 아래편에 있는데 제자들의 숙소였으며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하였다고 하여 일명 ‘다성각(茶星閣)’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길목 잔등은 다산 선생이 흑산도에 있는 약전 형과 고향이 그리울 때면 바다를 바라보며 마음을 달랬던 곳으로 이런 선생의 심회를 되살리기 위해 그 자리에 목조기와 정자인 천일각을 지었다. 천일각에 앉으면 다산이 뱃놀이와 고기잡이로 시름을 잊었던 구강포(九江浦, 강진만)가 한눈에 들어온다. 천일각은 지난 1975년에 세워져 30여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다산초당과 함께 명소가 된 정각이다. 건물이 들어선 위치가 적당하고 주재료인 목재가 오래되면서 주변 환경과 어울려 찾는 이들에게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다산의 초당에 대한 애착은 유배가 풀려 경기도 생가에서 여생을 보낼 때, 강진에서 올라 온 제자들에게 한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다. 먼저 동암의 띠와 초당 앞의 홍도화, 다천의 돌과 연지석가산의 잉어, 백련사 가는 길의 동백꽃, 다신계의 전곡(錢穀)에 대해 눈에 하나하나 선한 듯 제자들에게 다산의 풍경에 대해 묻고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대도 부끄러운 마음이 없어야 한다고 했네. 내 다시 다산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죽은 사람과 한가지일 것이야. 행여나 돌아간다고 하면 모름지기 부끄러운 빛이 없어야만 될 것이라.” 그는 강진의 초당생활 동안 수많은 저서와 다산이란 호를 얻었고, 세상은 차와 동양 철학의 정신을 얻었다. 동양철학의 거대한 완성, 위대한 선비의 정신을 세상은 깨달은 것이다. 다시 살아도 한점 부끄럼 없이. 다산 정약용의 생애 / the life of Jung, Yak-yong
본관은 나주로 1762년(영조 38) 당시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진주목사 정재원(1730-1792)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해남윤씨로 조선시대 유명한 서화가인 공제 윤두서의 손녀였다. 다산의 아명은 귀농, 자는 미용․송보이고, 호는 사암․열수․다산 등이며 당호는 여유당이다. 7세 되던 해에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 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라는 ‘산(山)’이라는 시를 써서 주위를 놀라게 했고, 14~15세 때는 이미 육경사서와 제자백가를 읽었다. 16세 부터는 이름난 학자 이가환과 이승훈을 찾아 학문을 익히고 이 익의 성호사설을 읽으면서 실학에 힘썼다. 22세 때(1783)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23세 때 처음으로 천주교를 한 때 접했다. 28세(178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벼슬살이를 시작해 경기도 암행어사, 병조참의(정 3품) 등을 지냈다. 이즈음 그는 '성설'과 '기중도설'을 지어 수원성을 쌓는데 유형거와 거중기를 만들어서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정조로부터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아 12년 동안 정조를 보좌하였다. 그러나 1801년(순조 원년) 천주교탄압사건인 신유사옥이 일어나자 서학(西學)에 관련하였다는 혐의로 둘째 형인 약전(若銓)과 함께 유배되었다. 이 때 다산은 경북 포항의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19일 만에 풀려나는데, 곧이어 황사영 백서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투옥되어 그 해 겨울에 강진으로 유배된다. 선생께서 강진으로 오실 때는 1801년 동짓달 어느 날 초라한 행색으로 찾아든 곳이 동문 밖 정자나무 근처 주막집이었다고 한다. 주막집엔 늙은 노파와 과년한 딸이 살면서 술을 팔아 그 날 그 날을 연명하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날도 저물고 하여 받아 들였다는 것이다. 북풍에 흰 눈 휘몰아치듯 남으로 강진 땅 한 밥집에 이르렀네. 작은 산들 다정히 바다를 가려주고 총총한 대나무들 꽃처럼 아름답네. 따뜻한 땅 한결 더 추운 겨울 옷차림이 가볍건만 밤이면 수심 더해 술로서 달래네 동백은 설이 오기 전 활짝 피어나니 이나마 나그네 근심 한껏 씻어주네 형 약전과 함께 유배 길에 올라 음력 11월 하순의 추운 겨울, 강진읍에 도착하여 지은 ‘객중서회(客中書懷)’라는 시이다. 선생께선 이 곳에서 고독과 유배의 아픈 마음을 달래셨단다. 때로는 북산 황토길을 따라 산 너머 고성암에 가서 속세를 잊고 시심에 잠기곤 하셨다. 선생께선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읊으셨다. 타향이 내 땅이 아니란 말 나는 믿지 않으리. 즐거이 평지에 선인(仙人)됨을 좇으리니 적소에서 시름을 달래면서도 선인이 되기를 갈망하였다. 또 선생은 자신이 거처하던 방을 사의재(四宜齋)라 칭하였다. 그 네 가지 지켜야 할 뜻은, ‘생각은 맑게 하되 맑지 않으면 더욱 맑게 하고, 용모는 단정히 하되 단정치 않으면 더욱 엄숙케 하고, 말은 요점만 말하되 요점이 전달되지 않으면 더욱 잔말을 줄이고, 행동을 무겁게 하되 무겁지 않으면 더욱 중후하게 하라’이다. 이 곳에서 다산은 주위 사람들의 청으로 1803년(순조 3)에 ‘아학편(兒學編)’을 완성하여 어려운 시기에 자신을 보살펴 주며 따르던 이 지방의 새로운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805년 다산은 당시 유명한 승려인 백련사의 혜장(1772∼1811)과 만나게 되고, 이어 강진읍의 뒷산인 보은산의 고성암 보은산방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 유교와 불교의 학문적 만남은 후에 다산이 ‘대둔사지(大芚寺誌)’ ‘만덕사지(萬德寺誌)’ 등 불교관계의 저술을 남기게 된 계기가 되었다. 백련사의 말사인 고성사에서 한동안 지내다 1806년에는 강진읍 목리(牧里)의 이학래(李鶴來) 집으로 거처를 옮겨 학동들을 가르치던 다산은, 1808년 외가쪽 산정(山亭)인 다산초당으로 이주하여 여기에서 유배가 풀린 1818년까지 10년 동안 기거한다. 처사 윤 단의 아들인 윤규로(尹奎魯) 등 3형제가 아들과 조카들의 교육을 위해 정약용을 다산초당으로 초빙했고 해남의 외가쪽 사람들은 고산(孤山) 윤선도 이래 가전(家傳)되어 오던 천여 권의 장서를 제공한다. 다산초당이 다산학의 산실로 된 데는 이렇게 외가쪽 집안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초당으로 이주하고서 비로소 다산은 마음 놓고 사색하고 연구하며, 영어(囹圄)의 억울함에서 벗어나 생의 즐거움을 느끼며 본격적인 연구 활동을 하여 수많은 저서를 완성할 수 있었다. 또 다산은 여기서 18명의 제자들을 가르쳐 모두 학자로 키우면서 실학을 집대성하게 된다. 다산은 모두 18년이란 긴 세월을 이 고장 강진에서 힘든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결코 유배의 한을 좌절과 절망으로 삭이거나 실패로 끝내지 아니했다. 이 곳에서 선생은 소위 ‘다산학(茶山學)’이라 칭하는 1표 2서, 즉 경세유표와 목민심서․흠흠신서를 비롯한 정치․경제․역사․문화를 망라한 방대한 저술인 「여유당전서」의 대부분을 완성한다. 어찌 보면 인간적으로 가장 불행한 시기와 역경을 불굴의 투지와 학문연구를 통해 끝내 우리 민족의 위대한 스승이 되었다. 다산의 대표적 저서로는「기중도설(起重圖說,1792)」․「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1796)」․「목민심서(牧民心書,1818)」·「경세유표(經世遺表,1817)」·「흠흠신서(欽欽新書,1822년)」등 5백여 권에 이른다. 다산의 유배생활은 산수를 벗 삼아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거나 임금에 대한 흠모의 정을 노래한 ‘연군가(戀君歌)’를 부르며 서울로부터 해배(解配)의 소식을 학수고대하던 보통의 유배객과 달리 핍박받는 백성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에 기초하여 '수기(修己)'로서의「육경사서」에 대한 방대한 연구와 '치인(治人)'으로서 국가의 총체적 개혁서인「목민심서」등을 저술한다.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물질적 기반의 변혁을 꾀해야 하고, 사고체계를 변혁시켜야 한다.’는 불멸의 진리를 인류에게 제시하였다. 사망 2년 전인 일흔셋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유배시절 저술했던 상서(尙書, 오경중 하나로 일명 서경)를 개정 보완했던 다산에게서 우리는 참다운 선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산은 유배 기간 중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지식인이 세상에 전하려고 책을 펴내는 일은 단 한사람만이라도 그 책의 값어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해서다. 나머지 욕하는 사람들이야 신경 쓸 것 없다. 만약 내 책을 정말 알아주는 이가 있다면, 너희들은 그가 나이 많은 사람이라면 아버지처럼 섬기고, 설령 적대시하던 사람이라도 그와 결의형제를 맺어야 한다.」 또 다산은 후일 술회하기를 「내가 나라의 은혜를 입어 실낱같은 목숨을 보전하여 여러 해 동안 곤궁하게 살아오면서도 저술한 책이 많아졌다. 상자 속에 감추어 둔 책들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날 때가지, 전해지기를 기다리기가 어렵겠구나. 나 죽은 후에 아무리 풍성한 제사를 지내준다 해도, 내가 기뻐하기는 내 책 한 편을 읽어주고, 내 책 한편을 베껴두는 일보다는 못하게 여길 것이니, 너희들은 꼭 이 점을 명심하거라. 붓과 벼루를 옆에 두고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해 왔다. 왼쪽 팔이 마비되어 폐인이 다 되어가고 시력이 아주 나빠졌는데, 다 무엇 때문이겠느냐. 너희들과 조카가 전술해 내며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고 글을 남겼다. 다산은 1818년 해배되기 전 18제자와 함께 다신계를 만들고 초당의 안위를 부탁한다. 귀향길은 약전 형과 함께 왔던 귀양길을 2년 전에 흑산도에서 병사한 형을 뒤로 하고 홀로 걸어 고향으로 돌아간다. 다산은 고향 경기도 마현에서 여생을 비교적 자유롭게 보내다 결혼 60주년이 되는 회혼일(1836년)에 자택에서 생을 마감한다. 다산이 마지막 남긴 회혼 시는 다음과 같다. 60년 세월 눈 깜작할 사이 날아갔으나 복사꽃 무성한 봄빛은 신혼 때와 같구려 살아 이별 죽어 이별에 사람은 늙었지만 슬픔은 짧았고 기쁨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강진 유배초기의 다산 / Dasan's early exil in Gangjin
다산초당에서 생활하기 전까지 8년여 동안 유배생활의 근거지였던 강진읍은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생활의 첫 발을 내딛은 곳이다. 서성리 강진의료원 앞의 다산공원에는 다산의 동상과 그의 ‘부채시(扇子詩)’를 적은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부채시는 예문관 즉 한림에 선발되어 함께 근무했던 정을 잊지 않고 먼 길을 달려와 위로하고 떠나는 친구 김이교(1764-1832)가 쥐고 있던 부채에 석별의 정을 적었던 칠언율시이다. 이별을 슬퍼하는 자신의 심정인양 내리는 빗속에서 옛 친구와 헤어져야 하는 유배객의 외로움과 쓸쓸함이 가슴을 적신다. 옥당(홍문관)과 함께 관리들의 선망의 대상인 한림(예문관)에 선발되었을 때 반대파들이 선발과정에 의혹을 제기하자 사직서를 제출하고 물러났다가 이후 정조의 여러 차례 부름에도 나가지 않아 결국 충청도 서산(海美縣)으로 귀양 갔던 경술년(1790년)의 일을 회상하고 있다. 역정(驛亭)에 내리는 가을비 벗을 보내기 더디게 하네 이 외로운 땅 찾아줄 이 누가 다시 있으랴 벼슬자리 다시 오를 것을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 이 능(李陵)도 고향엘 가고 싶었지만 끝내 이룰 수 없었네 유사(酉舍)에서 글 쓰던 날 아직도 생각하노니 경술년(庚戌年)에 칼 떨어지던 때를 차마 말할 수 있으랴 외로운 대나무 두어 떨기와 새벽 조각달만 날 지켜주니 옛 동산 그리워 머리 돌리고 눈물 줄줄 흘리네 약전 형과 마지막으로 나주에서 헤어져 유배지 강진에 도착한 다산을 맞이한 것은 살을 에는 찬 겨울바람과 삭막한 인심뿐이었다. ‘서학을 믿은 대역죄인’이 귀양을 오자 마을사람들 모두가 전염병환자를 보듯 다산을 피했다. 가는 곳마다 문을 부수고 담장을 무너뜨리고 달아나며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외가 쪽에서도 다산을 모른 채했다. 오직 동문 밖 주막집의 늙은 할머니 한 사람만이 뒷방 한 칸을 내어 주었다. 유일하게 유배객을 맞아 주었던 동문 밖 주막은, 현재의 군청 · 경찰서에서 동쪽으로 한 5백m쯤 가다가 왼쪽으로 올라가면 있다. 지금도 마을의 조그만 가게가 있는 정자나무 앞에는 정약용 선생이 거처하던 곳이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고, 뒤편으로는 옛 샘터(우물)가 보존되어 있다. 선생이 부른 ‘사의재(四宜齋)’란 ‘맑은 생각과 엄숙한 용모, 과묵한 언어와 신중한 행동’ 이 네 가지를 의(義)에 맞도록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이다. 다산은 1805년까지 4년간 여기에 머무는데, 사의재에서 다산은 주로 상례(尙禮)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강진읍 서성리에서 2.5km쯤 떨어진 보은산 길을 오르면 1805년 봄 백련사에서 만난이래. 두터운 교분을 쌓아온 백련사 혜장의 주선으로 다산 선생이 잠시 머물렀던 고성사 보은산방이 나온다. 제자 황 상이 머물던 궁벽한 곳이었지만 동문 밖 주점보다는 쾌적한 곳이었다. 사의재에서는 주로 상례를 연구하였다면 고성사의 보은산방에서는 주역을 주로 공부하였다. 다산과 혜장, 차(茶)의 만남 / the green-tea and Dasan
다산의 유배 18여 년 동안 고독한 강진 생활에서 말없이 따뜻한 위로를 해주던 친구는, 그윽한 차 향기와 더불어 다도를 즐기며 말동무가 되어 주던 혜장과 초의 두 선사(禪師)였다. 하지만 다산이 언제부터 차를 마셨는가에 대해서는 연구자에 따라 유배전의 음다설과 유배후의 음다설로 나눠진다. 여기서는 ‘유배 후의 음다설(飮茶設)’에 대해 알아본다. 다산은 강진에서의 귀양살이 기간 중 아암(兒菴) 혜장선사(惠藏禪師)로부터 차를 배워 즐겨 마셨다고 한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를 와서 동문밖 주막집에 거주한지 5년째 되는 을축(乙丑, 1805)년 가을에 인근 백련사에 소풍을 갔다가 다산 만나기를 갈구하던 혜장선사와 해후를 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차 생활을 시작하며, 그에게 명다(茗茶)를 부탁하는 ‘기증혜장상인걸명(寄贈惠藏上人乞茗)’이라는 시를 보내기까지 한다. 그는 오랜 기간의 유배생활과 학문연구로 인해 쇠약해지고 병든 몸을 치료하기 위한 약으로 차를 마셨으며, 혜장이 소개해 준 다선(茶仙) 초의선사와의 만남은 사제지간으로 발전한다. 다산은 귀양에서 풀려 한강변 고향집으로 온 후에도 초의선사나 강진 다신계의 선비들이 보내주는 차를 마셨고, 경기학인를 비롯한 막역한 벗들과 차와 시로써 사귀었다. 그는 생애를 마감할 즈음에도 다종(茶鍾, 찻잔)을 곁에 두고 지낸다고 할 정도로 차를 사랑하였다. 다산이 차 문화 전파에 남긴 업적은 실로 지대해 그 이전 차 문화는 맥이 끊어진 듯한 인상마저 준다. 다산이 백련사의 혜장스님을 만났을 때의 장면을 상상해 본다. 「비교적 몸이 자유로울 무렵, 읍에서 한 10리쯤 떨어진 도암 만덕산의 백련사를 찾아간다. 두 사람의 화제는 불교에서 주역(周易)으로 옮겨가며 날이 저물도록 계속된다. “혜장 스님, 차 맛이 좋습니다. 다시 스님을 찾아오면 그 때도 차를 주시겠습니까.” 다산이 묻는다. “주역(周易)에 밝으시니 다음 일을 익히 아시겠지요.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혜장 선사의 대답이다. 밤길을 걸어 강진읍 처소로 돌아온 다산은 혜장선사를 잊을 수가 없다. 당시 혜장의 나이는 34세로 다산보다 10년 연하였지만 유배생활에서 마땅한 벗 없이 오랜 세월을 지내오던 그에게, 차를 나눌 수 있는 벗으로 등장한 혜장은 유배 생활의 불을 밝히는 등(燈)불이었다. 반가움과 시름을 억누르지 못하고 잠을 뒤척이고 있을 때 새벽이 되어 인기척이 났다. 문득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 보니 뜻밖에도 손님은 혜장 스님이다. 둘은 서로 껴안고 눈물까지 흘린다.」 유학자 정약용이 젊은 스님과 교유하며 눈물까지 글썽였다는 것은 너무 감성적인 이야기이지만, 구전되는 이 이야기는 다산이 차에 대해 어느 정도 몰입하게 되는지를 나타내는 일화이다. 혜장은 이후 자신의 제자를 자주 다산에게 보내 안부를 물었고 거처를 강진 북산 고성암의 보은산방에 마련한다. 다산은 또 차가 떨어질 때면 혜장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주길 간청하곤 했다. 동백꽃 길, 유불선의 가교 / the road of camellia
다산초당 천일각에서 백련사로 가는 만덕산 산길은 구강포가 한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산책길이다. 상수리․도토리․떡갈나무들의 쌓인 낙엽이 뒹굴고 백련사 가까운 데로는 핏빛 동백꽃이 이른 기지개를 켠 오솔길은 유교와 불교 참선이 만나 어울리는 뜻 깊은 장소였다. 늦은 걸음으로도 40여분이면 다다를 수 있는 이 길을 유배객 다산과 10년 연하인 백련사의 아암(兒菴) 혜장(惠藏, 1772-1811)은 서로 오가며 인간적인 대화와 학문적인 토론을 하였다. 혜장선사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스승인 옹방강(翁方綱)이 ‘해동의 두보’라고 칭송할 만큼 뛰어난 분이었다. '아암'이라는 호는 유달리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한 혜장에게 다산이 "자네도 어린 아이(孀兒)처럼 유순할 수 없겠나" 하고 책망하자, 스스로 호를 '아암(兒菴)'이라고 불렀다. 산새 소리를 들으며 호젓한 오솔길을 따라 혜장을 만나고 오던 다산은 봄이면 소나무와 참나무 사이로 만발한 분홍색 진달래에 취해 ‘봄날 백련사에 유람가다(春日遊白蓮寺)’라는 시를 짓는다. 흰나비를 길동무 삼아 찾아간 다산에게 혜장이 ‘산경표’에 대해 얘기를 하였나 보다. 조각구름 흘러가며 흐린 하늘 개이고 냉이 밭에 흰나비 펄럭이며 날을 때 우연히도 집 뒷산 나무꾼 길 따라서 숲을 헤쳐 나가보니 보리밭 언덕이네 궁벽한 산촌, 봄날 아는 노인 왔다면서 벗 없던 거친 동네 각승(覺僧)은 어질었다. 더구나 나에게 도연명 찾은 듯 보여주며 산경표(山經表) 한두 권을 설명해 주네 천년 가람인 만덕산 백련사엔 다산과 관련한 유적은 쉽게 눈에 띄지 않으나, 다만 동백나무·후박나무·비자나무 밑 군데군데에 자라는 차(茶)나무가 다산의 자취를 느끼게 한다. 혜장은 다산에게 경학을 배우는 한편, 그 지방에서 천연적으로 생산되던 차를 권유하여 다산으로 하여금 다도에 일가견을 갖게 하였다. 이렇게 마음속의 얘기를 터놓고 학문적으로 깊은 대화를 나누던 혜장이 1811년 가을 해남 대흥사 암자인 북암(北菴)에서 40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자 다산은 그의 탑에 새기는 글(塔銘)에서「얼마 남지 않은 나의 세월에서 그대 입 다무니 산속 숲마저도 적막하기만 하다오.」라고 슬퍼하였다. 동백나무와 후박나무숲에 가려진 백련사는 차, 특히 만덕산 전차(錢茶)로 유명한 사찰로 엽전 모양을 닮았다고 하는 전차는 최고의 차로 인정받아 궁중에 진상되었다고도 한다. 그 제다법이 까다로워 참선의 경지 이상으로 어려운 고행의 길이라 하였다고 하니 예의 그 차 맛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겠다. 일전에 의하면 아암 혜장스님에 이어 다산선생은 이곳 백련사에서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선사와 완당 김정희 등 여러 시인 묵객들과 다도회를 가졌다고 전하는데, 이 또한 열 번을 우려내도 향기가 변함이 없다는 백련사 차 맛에 연연한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산유물전시관> 만덕리 보동마을, 다산초당 남쪽 700m 지점에 위치하며,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애와 업적 등을 쉽게 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다산연보․영정․가계도․학통․다산의 업적과 유물 등이 판넬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 있다. 영상실은 다산의 일생과 강진을 소개하는 영상물이 약 7분 동안 상영되는데 관광객이 영상실에 들어서면 자동으로 상영되므로 누구나 불편 없이 관람할 수 있다. 1999년 문을 연 120여 평의 전시관은 앞 6백여 평의 광장에 대형버스 15대 이상이 주차할 수 있어 학생들의 수학여행 등 단체관광에도 도움이 된다. 향후 다산이 강진에서 걸어왔던 길인 강진읍 동문샘에서 고성사 보은산방․목리 이학래집․다산초당․안운리 백운동으로 이어지는 체류지를 복원하고 야생차밭 및 다도체험장 등을 개발하면 문화체험 체류관광에 좋은 유산이 될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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