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령 병치의 윤동철 의병장과 행주대첩 / Uphill Pass of Byeong-chi

2006. 8. 20. 08:29내고향강진의 향기

동령 병치의 윤동철 의병장과 행주대첩 / Uphill Pass of Byeong-chi


 강진군 도암면과 해남군 옥천면의 경계로 양쪽에 긴 대나무를 걸쳐 놓으면 닿을 듯 좁은 산 고개인 병치(兵峙) 고개가 있다. 이 곳은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몰려든 수많은 의병들이 적과 싸우다 장열하게 전사한 곳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어지러울 때 이 곳 도암면 동령 마을에는 수많은 의병들이 나온 마을이다. 윤신은 이 마을에서 1557년 태어났으며 윤동철은 윤신의 아들이었다. 윤신에게는 4형제가 있었는데 그의 형 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 임금이 의주로 피난을 가실 때 모시고 갔던 부장으로 있었고, 윤신은 그의 형제 강과 약 그리고 아들 동철과 조카 치교․이경․익경을 중심으로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는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부근마을 젊은이들을 모아 군사 훈련을 시켰다.


 인근 수백 명의 의병들은 병치고개에 성을 쌓고 그 근처에다 밥을 지을 수 있게 솥을 걸어 두었다. 1953년 선조 임금께서 서울로 돌아오자 윤신의 형 윤도 고향으로 돌아왔다. 병치고개의 의병들은 방어선을 정비하고 의병을 보강하니 그 수가 1천여 명이 넘었다. 1597년 정유재란 시, 병치고개의 의병들은 왜군이 해남 방면에서 이 곳으로 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윤신과 의병대장 윤동철은 병치고개의 곳곳에 의병들을 숨겨두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윤동철은 병치고개에서 3백여m 되는 지점에 흐르고 있는 냇가(옥천면 성산천)에 다리를 놓아두고 길 쪽에 있는 낮은 산봉우리에 군사를 잠복시켜 놓았다. 의병들의 꾀에 넘어간 왜군들은 유유히 다리를 건너 쳐들어오고 있었다. 의병들은 일제히 활을 쏘아 많은 적군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신무기로 무장한 왜적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고 전쟁은 사흘이나 계속되었다. 결국 왜적들은 도망치기 시작했고, 의병들은 도망가는 적을 쫓아가며 화살을 마구 쏘아 싸움을 크게 이겼다. 적은 우리에게 속은 것을 알고 이번에는 진입로를 바꾸어 바로 병치고개로 넘어올 계획을 세웠다. 윤동철은 이런 계획을 미리 알고 의병들을 병치고개의 양쪽에 잠복시켜 놓았다. 왜군은 지난 1차전 싸움에서 크게 실패하였기 때문에 더욱 포악한 상태로 덤벼올 것을 예상하고, 병치에서 싸울 때는 죽음을 각오한 육박전을 하기로 결심하고 작전계획을 세웠다. 마을의 부녀자들도 나와서 병치 산봉우리의 돌을 날라다 놓는 작업을 했다. 윤동철 의병대장의 부인은 병치의 왼편 산 밑에 베틀을 차려놓고 군사들의 의복을 만드는 베를 짜서 옷을 만들었다.



                                 옥천면 성산천 부근의 만의총 / Tomb of Maneuchong


 


 왜적은 예상한 대로 진입로를 바꾸어 바로 병치로 쳐들어 왔고 전보다 많은 병력이었다. 의병들은 창을 들고 나가 싸웠으나, 일본군에 비해 중과부적이었다. 여자들은 돌을 나르고 노인들은 돌을 굴렸고, 더러는 맨주먹으로 대들었다. 의병들은 하나 둘 왜군의 말굽에 짓밟히고 총에 맞아 죽어갔다. 이 싸움에서 윤동철은 적을 30명이나 죽였으나, 적이 휘두르는 칼에 목이 베어 전사했다. 윤신과 그의 조카들도 전사했다. 윤동철의 부인은 싸움터를 두루 살피며 죽은 남편과 시아버지와 시아주버니의 머리를 치마폭에 담아와 동령부락의 청룡 등에 고이 묻었다.


 


65. 소의 멍에 모양 유인도, 가우도 / Gaudo Island



                         신기리 망호, 뒤에 가우도가 보인다 / Gaudo  Island and Manghori


 강진군 도암면 신기리, 가우도(駕牛島)의 면적은 총 0.29㎢로 13세대 30여명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는 작은 섬이다. 육지와의 거리는 0.8km, 해안선길이는 2.4km, 임야면적은 0.19㎢이다. 섬의 지형이 소의 멍에 같다하여 가우도라 부르게 되었으며 약 600년 전부터 가우도 우측 속칭 '우서끝'에 고씨가 20여호 살다가 점차 폐가되고, 이 후 약 400년 전부터 지금의 경주 김씨가 현 위치에 자리 잡아 살고 있어 지금까지 8대손을 이루고 있다. 강진군에서는 유일한 유인도로 도암 신기와 대구 저두리의 중간지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