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개고기에 우애를 담다
2006. 9. 2. 20:36ㆍ내고향강진의 향기
다산 정약용, 개고기에 우애를 담다
[오마이뉴스 최형국 기자]
바야흐로 삼복더위가 물러가고
연신 긴 혀를 내두르며 마음 졸였던 견공들이 다시금 삶의 희망을 찾는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물론 그 공포의 기간을 넘긴 견공들 또한 아직 더위가 사그라지지 않아 내심 마음 졸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매년마다 삼복더위는 찾아 올 것이고, 그들의 뼈와 살을 가르는 희생 또한 계속될 것입니다.
동물보호론 입장에서 개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과 개고기는 우리 고유의 음식문화다라는 주장 사이의 논쟁은 삼복더위가 한반도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아마도 계속 될 듯합니다.
이런저런 논쟁들을 듣다가 과연 조선시대에 개고기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을까 하는 궁금증에 사료를 뒤졌습니다. 개고기에 얽힌 따스한 사연이 있기에 한번 소개해 볼까 합니다.
물론 이 글이 그 가열찬 논쟁의 또 다른 출발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니 부디 넓은 아량으로 재미있는 역사의 시간여행이라고 생각하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흑산도와 강진으로 각각 유배 떠난 형제
시절이 그러했습니다. 정조의 재위시절 정약용을 비롯한 그의 형제들은 그야말로 꽃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조선후기 문예부흥의 절정을 꽃피우게 한 정조가 '나 간다라는 말도 없이' 그렇게 속절없이 승하한 후 조선은 말 그대로 나락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순조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대신 정치를 한 대왕대비 정순왕후를 시작으로 왕의 장인이라는 강력한 뒷 배경을 바탕으로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권이 조선의 국부를 야금야금 뜯어먹던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조선은 조금씩 침몰해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새로운 종교인 천주교가 들어와 활발하게 교세를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당시 지식인들이라고 하는 많은 학자들도 함께 했었는데 정약용 형제들 또한 깊은 연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사교금압(邪敎禁壓)이라는 명분 하에 200여명의 천주교신자들이 숙청을 당하는 신유박해가 발생했고, 이후 다산 정약용의 조카사위였던 황사영이 연루된 '황사영백서사건'이 터지면서 정약용의 가문은 완전히 풍비박산 나기에 이릅니다.
당시 정약용은 신유박해로 인해 경상도에 장기 유배된 상태였으나 다행히 이 사건과 관련이 없어 극형은 면하고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겼고, 형 약전 또한 흑산도로 기약 없는 유배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유배지의 생활은 글쓰기의 나날이었습니다. 유배를 떠난 정씨 형제들은 유배지에서도 쉼 없는 학문탐구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형 약전은 흑산도의 수산생물들에 대한 방대한 보고서인 <자산어보>를 편찬하기 위하여 각종 물고기와 해산물과 씨름을 하였고, 동생인 약용 또한 <목민심서>를 비롯한 다양한 저술활동에 해가는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갇혀 있는 유배지의 생활이 따분해서 공부라도 해야 직성이 풀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니 건강 또한 자연스럽게 약해졌겠지요.
정약용, 형 약전에게 개고기 소개하다
이런 와중에서 형과 동생은 가끔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학문적인 내용은
물론이고 다양한 세상사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 중 순조 11년(1811)에 형 약전에게 보낸 편지글 중에 형의 건강을 걱정하며
개고기를 먹을 것을 권유하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그의 편지 내용을 살짝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보내주신 편지에서 짐승의 고기는 도무지 먹지 못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어찌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도(道)라 하겠습니까. 도중(島中)에 산개[山犬]가 천 마리 백 마리뿐이 아닐 텐데, 제가 거기에 있다면 5일에 한 마리씩 삶는 것을 결코 빠뜨리지 않겠습니다. 도중에 활이나 화살, 총이나 탄환이 없다고 해도 그물이나 덫을 설치할 수야 없겠습니까. 이 곳에 어떤 사람이 하나 있는데, 개잡는 기술이 뛰어납니다."
당시 형 약전은 흑산도라는 섬에 유배된지라 먹는 고기라곤 맨날 바다에서 나는 물고기여서 뭍에서 나는 짐승의 고기를 먹지 못하여 '생명을 연장하는 도(道)'를 충분히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 또한 자신이 먹던 음식에 대한 연구에서 출발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후 계속되는 편지의 내용에서는 산개(山犬)를 어떻게 잡는지에 대한 조금은 잔인한 방법의 덫 만드는 방식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편지글에서도 잠시 언급하였듯이 5일에 한 마리씩 잡아 1년에 모두 52마리의 개를 잡는다면 일년 내내 맛있는 개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심지어 다산은 개고기에 함께 넣어 먹으라고 들깨 한 말을 편지와 함께 동봉해서 보내는 정성까지 보여줍니다. 여기에다가 새로운 개고기 요리법을 함께 첨부해서 보내 주는데….
다산에게 개고기 요리법 전수해준 학자는...
다산은 유배오기 전에는 박제가를 비롯한 소위 실학자들로 불리는 사람들과 많은 관계를
맺었습니다. 아마도 그 때 박제가한테 직접 개고기 요리법를 전수받았을 것입니다. 편지에 실린 초정 박제가의 개고기 요리법을
살펴봅시다
"삶는 법을 말씀드리면, 우선 티끌이 묻지 않도록 달아매어 껍질을 벗기고 창자나 밥통은 씻어도 그 나머지는 절대로 씻지 말고 곧장 가마솥 속에 넣어서 바로 맑은 물로 삶습니다. 그리고는 일단 꺼내놓고 식초·장·기름·파로 양념을 하여 더러는 다시 볶기도 하고 더러는 다시 삶는데 이렇게 해야 훌륭한 맛이 나게 됩니다."
요즘 개고기 요리법은 어떤지 모르지만, 아마도 당시 초정의 개고기 요리법은 유배 떠난 정약용의 입맛을 살리는 데 더 없이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요리법을 형한테까지 알려주려 했겠지요. 그런데 이 요리법으로 형 약전이 개고기를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는 현재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우애있는 편지글을 주고받으며 외로운 유배생활을 버티던 형 약전은 안타깝게도 그의 나이 59세인 1816년 흑산도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1801년 11월 하순 귀양길에 함께 올랐다가 나주 율정점(栗亭店)에서 눈물바다의 이별을 하고 그 후 16년간 단 한 번도 형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다산은 심장이 찧어지는 듯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래서 형의 묘지명에 못다한 학문에 대한 설움과 아쉬움을 담아내기도 하였습니다.
'개'는 견(犬)인가, 구(狗)인가
그런데 한자로 식용하는 개, 즉 개고기를 만드는 개와 애완용 개의 특별한 구별이 있었을까요? 당연히 둘 사이에는 예로부터 구분을 두어 사용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개에 해당하는 한자에는 크게 견(犬)·구(狗)·오(獒)·방(尨) 등의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 개는 견(犬)이라 하여 애완용 개를 말합니다. 두 번째 개는 구(狗)라 하여 식용의 개를 나타냅니다. 소위 말하는 '황구(일명 누렁이)'지요. 세 번째 개는 오(獒)라 하여 크기가 4척이 넘는 대형 개로 사냥에서 사용한 개를 말하고, 마지막으로 방(尨)이라고 쓰는 개는 삽살개를 지칭하며 조금 작은 사냥개를 표현합니다. 그래서 애완견(犬)이라고 하지 애완구(狗)라고 하지 않지요.
아무튼 아직도 날이 더워 혀만 빼고 헐떡거리는 견공들을 바라보며 삼복더위를 무사히 보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 해야 할지 대충 난감해 하며, 다산 정약용의 개고기에 얽힌 따뜻한 이야기를 전해 봅니다.
/최형국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에 등장하는 개고기 관련 편지는 <다산시문집 제20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 최형국 기자는 무예24기보존회 마상무예단 '선기대'의 단장이며, 수원 무예24기 조선검 전수관장입니다. 중앙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으로 몸철학과 전쟁사 및 무예사를 공부하며 홈페이지는http://muye24ki.com 입니다.
▲ <소구도>. 나른한 오후, 지루한 일상 속에서 옆구리가 가려워 뒷다리를 들어 몸을 긁고 있는 개의 모습입니다. 그 표정에서부터 평온하기 그지없습니다. 아마도 삼복더위를 무사히 넘기고 나른한 가을 오후를 보내는 듯 합니다. | |
ⓒ200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물론 그 공포의 기간을 넘긴 견공들 또한 아직 더위가 사그라지지 않아 내심 마음 졸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매년마다 삼복더위는 찾아 올 것이고, 그들의 뼈와 살을 가르는 희생 또한 계속될 것입니다.
동물보호론 입장에서 개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과 개고기는 우리 고유의 음식문화다라는 주장 사이의 논쟁은 삼복더위가 한반도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아마도 계속 될 듯합니다.
이런저런 논쟁들을 듣다가 과연 조선시대에 개고기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을까 하는 궁금증에 사료를 뒤졌습니다. 개고기에 얽힌 따스한 사연이 있기에 한번 소개해 볼까 합니다.
물론 이 글이 그 가열찬 논쟁의 또 다른 출발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니 부디 넓은 아량으로 재미있는 역사의 시간여행이라고 생각하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흑산도와 강진으로 각각 유배 떠난 형제
시절이 그러했습니다. 정조의 재위시절 정약용을 비롯한 그의 형제들은 그야말로 꽃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조선후기 문예부흥의 절정을 꽃피우게 한 정조가 '나 간다라는 말도 없이' 그렇게 속절없이 승하한 후 조선은 말 그대로 나락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순조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대신 정치를 한 대왕대비 정순왕후를 시작으로 왕의 장인이라는 강력한 뒷 배경을 바탕으로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권이 조선의 국부를 야금야금 뜯어먹던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조선은 조금씩 침몰해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새로운 종교인 천주교가 들어와 활발하게 교세를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당시 지식인들이라고 하는 많은 학자들도 함께 했었는데 정약용 형제들 또한 깊은 연관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사교금압(邪敎禁壓)이라는 명분 하에 200여명의 천주교신자들이 숙청을 당하는 신유박해가 발생했고, 이후 다산 정약용의 조카사위였던 황사영이 연루된 '황사영백서사건'이 터지면서 정약용의 가문은 완전히 풍비박산 나기에 이릅니다.
당시 정약용은 신유박해로 인해 경상도에 장기 유배된 상태였으나 다행히 이 사건과 관련이 없어 극형은 면하고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겼고, 형 약전 또한 흑산도로 기약 없는 유배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유배지의 생활은 글쓰기의 나날이었습니다. 유배를 떠난 정씨 형제들은 유배지에서도 쉼 없는 학문탐구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형 약전은 흑산도의 수산생물들에 대한 방대한 보고서인 <자산어보>를 편찬하기 위하여 각종 물고기와 해산물과 씨름을 하였고, 동생인 약용 또한 <목민심서>를 비롯한 다양한 저술활동에 해가는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갇혀 있는 유배지의 생활이 따분해서 공부라도 해야 직성이 풀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니 건강 또한 자연스럽게 약해졌겠지요.
정약용, 형 약전에게 개고기 소개하다
▲ 다산 정약용이 외로운 남도 강진 땅에 유배되어 썼던 <목민심서>의 모습입니다. 이 책은 지방 관리의 사적을 가려 뽑아 백성을 위하는 정치가 무엇이며,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의 지방관의 자세는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
ⓒ2006 최형국 |
"보내주신 편지에서 짐승의 고기는 도무지 먹지 못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어찌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도(道)라 하겠습니까. 도중(島中)에 산개[山犬]가 천 마리 백 마리뿐이 아닐 텐데, 제가 거기에 있다면 5일에 한 마리씩 삶는 것을 결코 빠뜨리지 않겠습니다. 도중에 활이나 화살, 총이나 탄환이 없다고 해도 그물이나 덫을 설치할 수야 없겠습니까. 이 곳에 어떤 사람이 하나 있는데, 개잡는 기술이 뛰어납니다."
당시 형 약전은 흑산도라는 섬에 유배된지라 먹는 고기라곤 맨날 바다에서 나는 물고기여서 뭍에서 나는 짐승의 고기를 먹지 못하여 '생명을 연장하는 도(道)'를 충분히 얻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 또한 자신이 먹던 음식에 대한 연구에서 출발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후 계속되는 편지의 내용에서는 산개(山犬)를 어떻게 잡는지에 대한 조금은 잔인한 방법의 덫 만드는 방식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서 편지글에서도 잠시 언급하였듯이 5일에 한 마리씩 잡아 1년에 모두 52마리의 개를 잡는다면 일년 내내 맛있는 개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심지어 다산은 개고기에 함께 넣어 먹으라고 들깨 한 말을 편지와 함께 동봉해서 보내는 정성까지 보여줍니다. 여기에다가 새로운 개고기 요리법을 함께 첨부해서 보내 주는데….
다산에게 개고기 요리법 전수해준 학자는...
▲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다산 생가에 모셔진 정약용 선생의 묘소입니다. 애달프게 그리던 형의 모습을 뒤로 하고 그도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
ⓒ2006 최형국 |
"삶는 법을 말씀드리면, 우선 티끌이 묻지 않도록 달아매어 껍질을 벗기고 창자나 밥통은 씻어도 그 나머지는 절대로 씻지 말고 곧장 가마솥 속에 넣어서 바로 맑은 물로 삶습니다. 그리고는 일단 꺼내놓고 식초·장·기름·파로 양념을 하여 더러는 다시 볶기도 하고 더러는 다시 삶는데 이렇게 해야 훌륭한 맛이 나게 됩니다."
요즘 개고기 요리법은 어떤지 모르지만, 아마도 당시 초정의 개고기 요리법은 유배 떠난 정약용의 입맛을 살리는 데 더 없이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요리법을 형한테까지 알려주려 했겠지요. 그런데 이 요리법으로 형 약전이 개고기를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는 현재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우애있는 편지글을 주고받으며 외로운 유배생활을 버티던 형 약전은 안타깝게도 그의 나이 59세인 1816년 흑산도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1801년 11월 하순 귀양길에 함께 올랐다가 나주 율정점(栗亭店)에서 눈물바다의 이별을 하고 그 후 16년간 단 한 번도 형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다산은 심장이 찧어지는 듯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래서 형의 묘지명에 못다한 학문에 대한 설움과 아쉬움을 담아내기도 하였습니다.
'개'는 견(犬)인가, 구(狗)인가
그런데 한자로 식용하는 개, 즉 개고기를 만드는 개와 애완용 개의 특별한 구별이 있었을까요? 당연히 둘 사이에는 예로부터 구분을 두어 사용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개에 해당하는 한자에는 크게 견(犬)·구(狗)·오(獒)·방(尨) 등의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 개는 견(犬)이라 하여 애완용 개를 말합니다. 두 번째 개는 구(狗)라 하여 식용의 개를 나타냅니다. 소위 말하는 '황구(일명 누렁이)'지요. 세 번째 개는 오(獒)라 하여 크기가 4척이 넘는 대형 개로 사냥에서 사용한 개를 말하고, 마지막으로 방(尨)이라고 쓰는 개는 삽살개를 지칭하며 조금 작은 사냥개를 표현합니다. 그래서 애완견(犬)이라고 하지 애완구(狗)라고 하지 않지요.
아무튼 아직도 날이 더워 혀만 빼고 헐떡거리는 견공들을 바라보며 삼복더위를 무사히 보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 해야 할지 대충 난감해 하며, 다산 정약용의 개고기에 얽힌 따뜻한 이야기를 전해 봅니다.
/최형국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에 등장하는 개고기 관련 편지는 <다산시문집 제20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 최형국 기자는 무예24기보존회 마상무예단 '선기대'의 단장이며, 수원 무예24기 조선검 전수관장입니다. 중앙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으로 몸철학과 전쟁사 및 무예사를 공부하며 홈페이지는http://muye24ki.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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