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8. 20. 07:42ㆍ내고향강진의 향기
무소유와 해탈의 무위사 | 2005.03.24 15: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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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무소유와 해탈의 무위사 월출산 남쪽에 고요히 자리한 무위사는 성전면 월하리 죽전마을 1174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무위(無爲)란 불교의 기본 양식인 무소유와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는 뜻이다. ‘무위(無爲)함은 무위함이 아니다’라는 노자의 무위자연 철학과 ‘세속에 대한 일체의 집착을 부정’한 불타의 가르침이 없어도 극락보전이 자리한 이 곳은 영원한 진리 세계를 추구하는데 충분한 한적하고 단아한 절이다. 사적기에 의하면 무위사는 신라 진평왕 39년(617)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며, 선각대사편광탑비에 신라시대부터 무위갑사란 이름으로 불렀다는 내용이 있다.
무위사는 배흘림(긴 타원형) 기둥을 세우고 맞배지붕 형식으로 건축된 극락보전․보물 제507호인 선각대사편광탑비․도지정문화재 제76호인 삼층석탑이 있으며, 조선성종 7년(1476)에 완성되었다고 하는 후불벽화인 아미타삼존벽화와 백의관음도(수월관음도)가 있다. ‘무위사지’ 등에 나오는 무위사에 관한 기록을 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월출산 남동쪽에 있는 고찰로서 617년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하였고, 875년(신라 헌강왕 1) 도선(道詵)이 중건하여 갈옥사(葛屋寺)라 개칭하였다. 946년(고려 정종 1)에는 선각(先覺) 형미(逈微)가 3창하여 모옥사(茅玉寺)라 하였다가, 1555년(명종 10) 태감(太甘) 선사가 네 번째 중창하여 무위사라 하였으며 건물이 30여 채 암자는 35개소였다고 한다. 그 후 화재 등으로 축소되었고, 1974년 벽화보존각·해탈문·분향각·천불전·미륵전 등을 중건하면서 옛날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무위사 뒤쪽에 병풍처럼 둘러 싼 산을 월출산 미황재라 부른다. 유명 풍수꾼들이 황제가 나올만한 명당이라고 하였다 하나 아직 황제는 나오지 않았다. 미황재를 넘으면 영암 도갑사에 이를 수 있으나, 현재 이 등산로는 자연휴식년제에 의해 폐쇄되었다. 11. 단아한 해원(解寃)의 집 무위사는 '남도답사 1번지'를 가장 멋지게 장식하는 유적이다. 월남사지에서 녹차밭 사이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 3㎞쯤 가면 월출산을 등지고 남쪽 바다를 향해 고즈넉이 서있는 사찰이 무위사이다. 무위사에 처음 들어서면 사천왕문이 나오는데, 네 명의 천왕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고 있다. 사천왕은 불국정토의 외곽을 지키는 신으로서 각각 동서남북을 지키게 된다. 절의 중심 정면에 서서 오가는 방문객들과 세월의 깊이를 재는 극락보전(極樂寶殿)은 언제나 의연하고 단아하고 아름답게 서 있다. 다음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박사의 글이다. “무위사에는 일주문(一柱門)이 없으므로 천왕문(天王門)을 지나면 곧바로 절집 마당이다. 수령이 수백 년 된 듯한 느티나무 아래에 서서 사위(四圍)를 둘러보면, 월출산의 산자락에 안기듯 감싸인 절집이 더없이 안온하게 느껴진다. 도회의 일상적인 삶에 길들어 있는 사람들은 무위사에 당도하는 순간, 세상에 이처럼 질박하며 우아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라곤 한다. '무위사'라는 이름조차 얼마나 매력적인가!” 하지만 무위사는 매력적이기 이전에 우리나라 수천 년의 역사동안 외침과 내환, 뜻하지 않은 재난 등으로 비명에 숨져간 영혼들을 위한 포근한 안식처라 생각해야 맞을 것 같다. 억울하고 비통에 가득 찬 가족이나 친지들이 망자들의 극락왕생을 빌거나 염원하는 ‘해원(解寃)’의 장소로서 이 절은 위안과 해탈의 길로 인도하여 주는 장소인 것이다. 나라의 재난을 없애고 복을 기원하는, 오랜 전란에 시달려온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파괴된 생산력을 회복하기 위한 무위자연의, 그래서 사찰 이름도 무위사(無爲寺)이고 부처님을 보시는 대웅전도 극락왕생을 비는 ‘극락보전’이라 하지 않은가. 이를 고증하듯「신증동국여지승람」권 37 ‘강진현 불우조’에는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했던 무위사를 이제 중수하고 이로 인해 수륙사(水陸社)로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위사가 수륙사로 지정된 것과 극락전의 건립, 아미타삼존도 · 아미타여래도 등의 벽화조성 시기 및 배경 등에 있어서 상호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는 수륙재(水陸齎)를 빈번하게 행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수륙재는 지상에 떠도는 망령을 부처님에 의하여 환생케 하는 재생 의식으로서 적을 포함한 전사자를 위로하는 불교 의식이다. 죽은 영혼을 달래려는 수륙재는 곧 살아 있는 자들의 애도와 복수심까지 포용하려는 차원에서 거행된 불교 의식인 것이다. 수륙사로 지정된 무위사에 극락전이 건립되고 아미타불의 벽화가 조성되는 것은 이와 같은 신앙 구조 속에서 가능한 것이라 여겨진다.
또 ‘선각대사편광탑비’를 보면 남쪽 바다를 향해 여의주를 입에 문 거북이의 장엄한 모습은, 찰나처럼 낙엽처럼 일순간의 삶을 마치고 영원으로 향하는 영혼들을 위해 충분한 위안이 되는 모습으로 당당히 서 있다. 이 거북이의 늠름한 모습은 남해의 왜구와 남도의 재앙을 막아내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무위사 진입로 좌측으로는 벽화보존각과 3층 석탑, 선각대사편광탑비가 있는데 벽화보존각에는 극락보전을 수리하면서 벽화를 떼어내어 보존하고 있으며 무위사 3층 석탑은 월남사지 3층 석탑과 양식 면에서 대비되는 신라계 석탑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선각대사편광탑비 뒤로는 산신각과 민불을 모신 제각이 있는데, 여기 민불의 모습은 친근하면서도 듬직하고 선한 모습을 하고 있어 편안한 느낌을 주는 석불로 폐찰된 수암산의 수암사 민불로 전해진다.
난대림 북방한계선인 월출산 남쪽의 다양한 수목과 생물들을 관찰할 수 있는 무위사지구 자연관찰로는 무위사 경내 후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약 1km의 구간으로 각종 나무와 풀과 이들과 어울려 사는 새와 곤충 등 자연생태계를 관찰하는데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다. 숲에서 나오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아름다운 소리와 향긋한 흙이나 꽃 냄새를 맡으며 자연이 전해주는 느낌을 체험해 볼 수 있다.
12. 무위사 극락보전 극락보전은 불교의 이상향인 서방극락정토를 묘사한 건물로, 국보 제13호로 지정된 정면 3칸․측면 3칸의 목조 건축물이다. 이 극락전은 1983년 옥개부 해체 보수시 중앙간 종도리 장혈에서 ‘선덕오년’이란 묵서명이 발견됨으로써, 이 건물이 세종 12년(1430) 효령대군 등에 의해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극락보전이란 서방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들의 안락과 수명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부처인 아미타불을 모신 곳으로, 좌우에는 아미타불을 보좌하는 협시보살로써 자비를 상징하는 관세음보살과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으로 이끄는 지장보살을 배치하였다.
목조 건물은 제각기 다른 면모를 보이는데, 무위사 극락보전은 목조건물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 건물은 알맞은 평면 구성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목조끼리 짜 맞춘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柱心包) 양식이다. 직선재료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각의 가구(架構)를 짰는데 그 기법이 고려시대 양식보다 세련미가 있다. 처마를 깊게 하고 좌우로 뻘목을 길게 하는 이유는 비가 집체에 뿌리는 것을 막으려는 데에 있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엄숙함이 있으면서 조선 초기 건물에서 보이는 단아한 맛이 살아있는 보기 드문 건물이다. 호남지방 특유의 길게 늘어진 처마와 건물의 멋을 잘 지녔다. 어간보다 협간의 간살이가 더 넓다. 간살이에 비하여 기둥의 높이는 상대적으로 짧은데 그렇다고 낮아 보이지도 않는다. 등이 약간 휘어진 맞배지붕의 물매가 주는 인상도 한몫하는 듯 하다. 넓은 간살이와 기품 있어 보이는 지붕 높이의 조화가 입면관을 단정한 위엄이 있으면서도 평골하고 안정되어 보이게 한다. 이 건물은 이른바 백제계 건물류에 속한다. 은근한 배흘림기둥을 갖고 있으며 앞쪽 3칸 전부에 4분합의 네짝문을 달고 궁판 받친 솟을빗살무늬를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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