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풍경 집 밖에서 누가 나를 부른다 새댁으로 불리다가 아무개 엄마로 불리다가 마흔 넘어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던 이름 아무도 불러주지 않던 내 이름을 동네방네 부르는 그녀는 누굴까 창밖을 보았다 연분홍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길거리에 서있다 손을 흔들며 아는 척을 한다 눈이 ..
하늘의 차, 땅의 차 기도는 하늘에서 축복을 받고, 노동은 땅에서 축복을 파낸다. 기도는 하늘의 차, 노동은 땅의 차, 이 둘은 당신의 집에 행복을 실어다 준다. - 몽테뉴 노동을 한 뒤의 휴식이라는 차. 미음을 기도드린 뒤의 위안의 차. 노동과 기도로 이루어진 삶은 온갖 축복을 섞어 내..
라디오와 거울 어느 소설을 읽다가, 거기에 등장하는 '라디오와 거울'이라는 단어에 가슴이 뭉클해지며, 그 두 단어가 주는 그리움과 기분의 환기에 시절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버지가 호마이카 라디오를 사오셨을 때, 온 식구는 신비로운 소리에 옹기종기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다..
엄마, 집에 가요 예순 중반 아들이 구십을 앞둔 어머니에게 하는 말이 "엄마, 집에 가요." 입니다. 뇌경색으로 쓰러진지 9개월째인데 아들뿐만 아니라 간호사 및 간병인도 알아봅니다. 허나 입으로 드시는 식사를 계속 거부하여 부득불 콧줄(비위관)을 하고 계시는데 답답함을 나에게 하소..
저장된 전화번호를 누르며 "뇌는 살로 된 정신이다. 지휘자가 지휘봉을 휘둘러 교향악의 큰 줄거리를 지시하듯이 사유가 운동하는 마디들을 짚어주는 단순한 무언극에 불과하다." 신체는 점점 늙어가서 주름이 지거나 흠집이 나거나 본색도 변하는데 반대로 뇌는, 많이 사용해 주름지게 ..
문득, 바구미처럼 가볍게 쌀을 씻는데 바구미가 까맣게 뜬다 한사코 구석으로 몰리는 먼지 같다 보자기를 펼치는 것처럼 확 떼로 펼쳐지는 바구미 바구미가 뜬 구석이 생생하다 바구미가 뜨면 공중이 자라는 것 같다 자라난 공중 끝에 서 한없이 작은 바구미가 뜬다 불쑥 없던 것이 뜬다 ..